8. 길든 짧든 삶은 여행

D-23. 낯선 섬에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혼자 걸었다

by 유랑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 그것도 편안한 지인들과 어울려서 배를 타고 섬으로 가서 경치 좋은 곳에서 걷고 하루 이틀 자고 온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원래 나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해가 바뀌고 새 달력을 받으면 다음 해의 여행 일정을 체크했고 가방에 세면도구와 속옷 한 벌만 챙겨 들고 어디든 떠날 수 있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방랑은 내 본성이었다. 한데 추자도 여행을 앞두고 이상하게도 자꾸 축 쳐지기만 할 뿐, 짐을 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 데도 갈 의욕이 없었다.




몇 달 전부터 함께 여행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던 지인에게 미안해서 차마 못 가겠다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꼼짝할 기운이 없었고 머릿속은 캄캄하기만 했다. 여행가방은 쳐다도 보기 싫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자정이 넘어서 마지못해 배낭을 꺼냈다.

일단 노트북을 넣고 책을 한 권 챙겼다. 고작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데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시간이 날까 싶었지만 노트북과 책이 없으면 불안할 것 같았다.

한참을 또 멍하니 있다가 여벌 옷을 한 벌 챙겼고 속옷과 양말도 넣었다.

자기 전에 양치질을 하다가 세면도구를 빠뜨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옷장 선반에서 찾은 여행용 세면도구에 쓰던 기초화장품 샘플이 있길래 배낭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지인의 모닝콜에 간신히 눈을 뜨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약속 장소에 모인 일행은 다들 즐거워 보였고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먹구름처럼 무겁기만 하던 우울이 조금씩 걷혀갔다.

제주항에서 추자도로 가는 여객선에 오르자 다들 2층이 전망이 더 좋다며 떠들썩하게 올라갔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1층 객실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파도의 너울거림에 따라 몸이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나에게도 젊었던 날과 행복했던 과거가 있었는데.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내가 쉰 살이 넘은 이혼녀가 되었다는 게, 곁에 남은 가족이 하나도 없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제주도에서 만난 이들 끼리는 섣불리 과거를 묻지 않았다.

나도 이곳에 오기 전에는 결혼했냐, 가족은 어떻게 되느냐, 는 평범한 질문이 무례할 수도 있단 걸 몰랐다.

누군가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몰랐고,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되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감았던 눈을 떠보니 푸른 바다 한복판, 제주에서 추자도로 건너가는 배 안이었다.

촌스러운 파란색 승객용 레자 의자에 앉아서 뉴스 화면이 지직거리는 티브이를 피해서 얼룩진 유리창을 쳐다보고 있었다. 소금기를 머금은 실내 공기는 텁텁했고 나는 쉰한 살의 이혼녀였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자,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가족은 나를 떠났고, 세상의 끝까지 떠밀려와서 남은 것은 늙어가는 몸뚱아리 하나 뿐이었다. 앞으로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죽어가더라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작게 웅크린 내 몸이 의자 위에서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배가 선착장에 닿았다.


승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출입문 앞으로 길게 줄을 섰다. 지인들이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2층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일행 세 명중 두 명은 이혼했고 한 명은 미혼이었다. 수년 전에 육지를 떠나 제주도로 와서 혼자 살았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언뜻 나도 평범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내 처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지인들은 축 쳐진 나를 부추겨서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끈질기게 권했다. 그들 덕분에 추자도까지 올 수 있었다.


초가을로 접어드는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푸르렀고 바다는 너울거리는 비단 폭처럼 아름다웠다.

아담한 민박집과 식당이 늘어선 소박한 어촌 마을을 두리번거리다 보니 점차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지인 한 명이 앞장서서 숙소로 안내했다.

우리는 민박집에 짐을 풀고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곧이어 한 상 가득 푸짐한 음식이 차려져 나왔다. 칼집을 넣어서 석쇠에 바싹 구운 생선에는 굵은 소금을 뿌려서 짭잘했고 신선한 조개들이 입을 벌린 전골은 감칠맛이 났다. 톳 무침과 장아찌, 다시마 등 밑반찬도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였다.

빈 속에 요리를 실컷 먹은 후 길을 나섰다.


상추자도의 나바론 하늘길은 바닷가 절벽이 영화 나바론 요새에 나왔던 풍경과 흡사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안길은 나무 계단으로 아늑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모자와 바람막이 점퍼가 펄럭거렸다. 발아래로 까마득한 절벽이 보였다. 짙푸른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비할 바 없이 아름다웠다.

한 시간여 아름다운 바닷길 능선을 따라 걷는 동안 침울함이 세찬 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리고 어느 사이 나는 지인들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낯선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을 때도 마음속의 슬픔은 그대로였지만 세상에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과 어울려서 여행을 떠나고 트래킹을 했다.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걷고 또 걷다가 저 푸른 하늘 속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길은 얼마 안 가서 끝났다. 이번 여행 리더는 첫날 일정이 끝났으니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마시고 민박집에서 쉬자고 말했다.

시골 마을의 후줄근한 카페에서 얼음이 사각거리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났더니 또 걷고 싶었다.

지인들은 굳이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함께 놀고 싶으면 허물없이 끼워주고 혼자 있고 싶을 때면 모른척 내버려 둬 주는 고마운 이들이었다. 가족이 아니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이였지만, 서로 아무런 의무도 집착도 없었으므로 마음 가는대로 웃으면서 어울려 놀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은 2박 3일이었지만 아직 사람들과 여러 날 부대끼기 힘들어서 다음 날 돌아간다고 양해를 구해 놓은 상태였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카페를 나와서 올레길 안내센터에 들어갔다. 지도 한 장을 얻어서 손에 들고 추자도 올레길 18-1, 18-2 코스에 대한 설명을 대충 들은 후에 길을 나섰다. 해안 절벽을 따라서 인적 없는 숲길을 혼자 걷는 게 좋았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을 걷자니 외롭지도 않았다.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멍하니 생각했다.

나는 혼자 낯선 섬을 헤매고 있다. 살던 곳을 떠나서, 마치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사위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청색 땅거미가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아쉽게도 18-2코스를 완주하지 못한 채로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선착장의 배들은 환하게 집어등을 밝힌 채로 바다로 떠나고, 마을 지붕 너머로는 천천히 붉은 석양이 내리는 중이었다.

일이 십분 후 마법처럼 내 앞에 도착한 버스는 일행이 있는 숙소를 향해 달렸다.




어두운 차창밖을 보면서 나는 또 생각한다.

아직 나는 여행하는 중이다. 노트북과 책 한 권, 여벌 옷 한 벌이 든 배낭을 숙소에 놓고 와서 첫날 이십 킬로, 다음날에도 그만큼 또 걸을 예정이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 여행이, 꿈처럼 빠르게 지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