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괜찮을 때도 있었다. 텅 빈 집에서 잠이 깬 날 아침에도 낯선 여행지 숙소에서 눈을 뜬 것처럼 덤덤한 날이.
그가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가기로 내가 선택했다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떠나보냈다고 여기는 날이 있었다.
다시는 그와 내가 서로 사랑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울부짖지 않는 채로 망연히 체념하는 날이, 영원히 이별하지 않는 인연은 있을 수 없다며 고개를 숙이는 날도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도 잠깐 그대로 누워있다가 휴대폰 타이머를 15분으로 맞춰놓고 몸을 일으킨다.
삶은 계란과 껍질째 자른 사과로 아침식사를 하고 세수를 하는데 15분, 옷을 차려 입고 외출 준비를 하는 데 15분, 총 30분이 소요된다.
태풍이 지나간 9월 중순의 하늘은 푸르렀고 가벼운 흰구름이 뭉실뭉실 떠있었다.
하얀 레깅스 양말에 흰색 휠라 운동화를 신고 크로스백에 골프장갑을 넣고는 안쪽에 자외선 차단용 암막 처리가 된 양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옷자락이 휘날리도록 보폭을 크게 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서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날렸다. 트래킹으로 단련된 다리는 시내 아스팔트 길 정도야 날듯이 걸을 수 있었다. 걸으면서 제주도에 내려와서 스쳐간 인연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과 가슴 아팠던 일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받아 적으려고 그 자리에 멈춰서 급하게 휴대폰 키패드를 누른다. 오늘은 골프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클라이밍 모임에 다녀온 후 저녁에 카페에 앉아서 차분히 글을 써야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문장을 받아 적기만 한다면 단편소설 하나 정도는 금방 쓸 것만 같다.
아름드리 팽나무가 구불렁구불렁 진녹색 가지를 드리운 길모퉁이를 돌아서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골프연습장에 도착하자 안내직원이 난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지난밤 태풍으로 시설 보수 중이라며, 오후에나 개장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재개장하면 전화로 알려달라고 말한 후 돌아섰다. 헛수고라기보다는 동네 한 바퀴 산책을 한 셈이다.
삼십여 분을 다시 걸어와서 집에 도착하자 소파에 주저앉아 미뤄뒀던 일을 처리했다.
별것 아닌 자질구레한 일들이었다. 그의 카드로 자동 이체되던 통신비와 가스요금, 주유비 등등을 확인해서 지로로 납부하거나 내 카드로 옮기는 일 등등.
내친김에 만기 된 예금을 재예치하고 위텍스 앱을 깐 후에 지방세도 모조리 납부했다.
청구서 문자 메시지나 카카오톡으로 날아오는 내용을 확인하고 일처리를 하기 힘든 날도 있었지만 수월하게 되는 날도 있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끼고 몸은 허깨비처럼 휘청거리는 날이 있었고 그저 깨어있는 꿈속을 걷듯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날도 있었다.
오늘은 후자였다.
나는 카드사별로 다른 혜택을 꼼꼼하게 따져가며 세금을 납부하고 금리가 높은 파킹 통장에 은행 잔고를 이체했다.
어젯밤까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싶다가 오늘은 현금 캐시백 이벤트에 응모하는 내가 웃겼지만, 어차피 세금은 내야 했고 차에 기름도 넣어야 했다. 골치 아픈 일은 남편에게 떠맡겼던 때와는 처지가 달랐다.
그는 나를 떠나서 후련할까. 떠나던 날 무거운 짐을 털어낸 듯이 해맑고 홀가분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서른두 살에 결혼했다가 쉰한 살에 이혼하고 혼자가 되었다.
반드시 끝이 나는 인간의 삶은 허무한 꿈과 같은 것. 하고픈 일을 다 하지 못하면 삶에 집착이 남아서 다시 태어난다고 어느 책인가에서 읽었다.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와 다시는 이별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삶이란 것은 도통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무것도 못하는 날이 있고, 모든 것이 지나간 꿈처럼 그저 살아지는 날도 있었다.
오후에는 클라이밍 모임에 나갔다. 지인들과 활기차게 인사를 나누고 준비운동을 한 후에 엉거주춤 실내 클라이밍 장의 벽을 탔다. 팔 힘도 없고 운동신경도 둔해서 좀처럼 잘 되지 않았지만 대충 흉내를 내면서 일행들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다.
근처 갈빗집에서 클라이밍 팀과 푸짐한 저녁식사를 했다. 다들 클라이밍을 하느라 팔이 아파서 가위로 고기를 자르기는커녕 젓가락을 들 힘도 없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숯불에 갈비를 뒤집어가며 바짝 구워서 젓가락을 바쁘게 놀렸다. 일행들과 헤어진 후에는 골프연습장에 갔다.
하프스윙 동작이 아직 어설펐지만 골프채를 위로 쳐들고 크게 휘둘렀다. 타로카드에 나오는 낫을 든 사신처럼, 맥없이 쭉 내민 내 모가지를 댕강 치듯이 골프공을 세게 날렸다.
정확하게 맞아서 경쾌하게 공이 날아가는 순간에 짧은 기쁨을 느낀다. 제대로 안될 때가 훨씬 많지만, 밤하늘을 보면서 골프 연습을 하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이혼 후 20일째.
오늘도 결국 일기 외엔 아무 글도 쓰지 못했다. 하루 종일 운동을 했더니 손마디가 쑤셔오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피곤했다. 내일 아침 일찍 트래킹을 나가기로 했으므로 배낭을 챙기고 일찍 자야지.
시간이 지나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여전히 아프기를, 그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던 이 슬픔이 조금도 사라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