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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Dec 15. 2023

독신자에게 스위트홈이란 머나먼 꿈일 뿐인 걸까

여자 셋이 살 집 찾기가 너무 어려워!

일요일은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배우기로 한 날이었다.

대도시의 틀에 박힌 생활을 뒤로하고 제주로 온 나와 친구들은 제주에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나 배움에 적극적이었다.

제주에서 만난 화가 선생님도 비슷한 시기에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내려오신 분이었다.

유명 미술관에서 여러 번이나 전시를 하신 화가님은 일반인인 우리를 가르치기엔 과분한 분이었지만 제주 정착 초기라 바쁜 스케줄이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소규모 드로잉클래스를 수락해 주셨다.     




서귀포 안덕면에 있는 화가님 화실에 둘러앉아서 선생님이 스무 살 유럽여행 때부터 간직해 온 고흐의 화집을 펼쳐보았다. 앞으로는 스케치 한 장을 할 때마다 그 순간의 생각이나 감상도 글로 써놓기로 했다.

한 가지 일에 진심을 다 해온 분들에게서는 뭐라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차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있다.

화가 H선생님에게서도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기운이 풍겨왔다.

    

야외 드로잉을 하기 위해 스케치북과 그림 도구를 간단히 챙겨서 차를 타고 사계리 해안으로 갔다.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건 즐거웠지만 막상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려니까 막막해졌다.

눈앞의 풍경이 눈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사진 한 장 찰칵 찍는 거야 쉽지만 그림으로 그걸 표현해 내는 건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위에 앉아서 멍하니 파도를 바라보았다.

이사할 집을 못 찾아서 마음이 어수선한 탓이었는지 짙푸른 바다와 콘크리트 방파제는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기껏 수업료 드리고 친구들과 시간 맞춰서 나왔으니 뭐라도 그려야 했다. 수채화 물감으로 파도의 선도 붓칠해보고 해변의 돌도 회색톤을 다양하게 내서 동글동글하게 칠했다.


명랑한 K는 선글라스를 척 쓰고 멋지게 바위에 걸터앉은 검정과 갈색 선으로 뭔가 동양화처럼 보이는 절벽을 그리고 있었다. 귀여운 Y는 그림 그리는데 아주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움직임도 거의 없이 청보라색으로 방파제와 구름의 윤곽선을 그리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산만한 어린애처럼 금세 싫증이 났다.

뭐든지 재능은 타고나는 것 같았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라고 하면 결과물은 신통치 않을지언정 몇 시간이고 혼자 노닥거릴 수 있는데 그림은 아니었다.

한라산에 올라갔을 때 나란히 서서 작은 캔버스에 산봉우리를 그리던 젊은이들을 보고 제주의 풍경을 나도 캔버스에 옮겨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린다면 특별한 시간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막상 해보니까 힘들고 지루할 뿐이었다.


한 시간 후 서로의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나눴는데, 화가 선생님은 목탄으로 하늘과 바다 스케치를 네 장이나 한 걸 보여주셨다.

K는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봤는데 좀 어렵기도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Y는 시간이 부족했다면서 집에 가져가서 나중에 완성해야겠다고 했다.

나는 우중충하게 그린 바다 그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속이 상했다.

하다못해 집 뜰에 핀 노란 잡초나 나팔꽃을 일기장에 색연필로 그렸을 때도 이보다는 잘 그렸고 훨씬 더 뿌듯했는데, 각 잡고 레슨비 드려가며 드로잉클래스에 나왔더니 이게 뭐람!

집이 안 구해져서 심란한 탓인지도 몰랐다.  창작이란 사소한 거라도 마음 내킬 때, 집중할 수 있을 때 하는 건가 보았다.     


드로잉클래스가 끝나자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기로 하고 근처 카페를 알아보려는데, 스마트폰을 잡자마자 습관처럼 부동산을 눌렀다.

헌데 이를 어째!

가까운 곳에 타운하우스 연세 매물이 떡 보이는 거였다.


- 여기 괜찮아 보이는데... 마침 이 근처야.

저녁 먹을 데 찾다가 웬 부동산?

사차원 사백퍼인 뜬금없는 내 말에도 융통성 넘치는 친구들은 즉각 관심을 기울여주었다.

- 여기 먼저 가 볼까요?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K와 Y와 머리를 맞대고 전화번호를 눌렀다. 주인분이 바로 받아서 주소를 알려주었다. 한 달 살기로 임대하는 타운하우스인데 연세로 내놓았는데 집에 계시는 분들께 양해를 구해 놓겠다고 했다.


차를 몰고 가는데 한적한 도로변 양 옆에는 한창 피어난 가을 억새가 눈 닿는 곳 어디나 부드럽게 한들거렸다.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이층 집은 밝은 분위기였고 한 달 살기 하시는 분들도 무척 인상이 좋으셨다. 여행 오신 분들이라 방해받기 싫을 수도 있었을 텐데 기꺼이 집을 보여주셨다.


하지만 집 자체는 글쎄...

일 층 안방에만 붙박이장이 하나 있을 뿐, 이 층 방 두 개는 너무 작았고 수납공간도 없었다. 캐리어 한두 개 가져온 여행자들이 한 달 살기 하기에 무척 좋은 집이었지만 독신 여자 세 명은 엄연히 세 가구였고 각자 드레스룸과 수납공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이 제주시까지 출퇴근하기에도 애매하게 먼 거리였다.


분위기 좋고 수납공간 충분한 이 층집 구하는 게 정말이지 쉽지 않구나, 한숨이 나왔다. 집 구경 잘했다며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발걸음이 헛헛했다.

또 허탕인 거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발을 질질 끌며 찾아간 동네 이탈리안 식당은 그저 그랬다.

딱히 나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드는 구석도 없었다.

쿱 샐러드와 딱새우 로제 파스타의 모양이나 맛은 평범했고 양은 적은 데다 가격은 오션뷰 맛집 못지않게 사악했다.


그림 그리고 집 보느라 피곤해서인지 다들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로 자꾸만 대화가 끊어졌다.

전날 토요일에 만나서 온종일 붙어 다니면서 집 세 개 보고 지인 가게도 갔는데, 일요일에는 제주 소그룹 드로잉클래스에서 화가 선생님께 그림을 배우고 또 집도 봤건만, 분명히 좋은 친구들과 좋은 시간들을 보내는 데도 기분이 왜 이럴까.

친구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던지 커피를 마시고도 다들 텐션이 자꾸만 가라앉기만 했다.     


- 우리 3차 갈까요?     

Y의 말에 축 늘어져있던 나와 K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 내일 휴일이잖아요.


다음 날 월요일은 한글날, 추석 다음 주의 황금연휴였다. 출근을 안 해도 되니까 밤늦게까지 놀아도 되는 거였다. 찜찜한 기분으로 혼자 집에 가기 싫었는데, 방글거리는 Y의 눈웃음이 그날따라 어찌나 귀엽던지!

     



- 어디 재즈바 같은 데 갈까? 제주시까지 가도 좋아.     

밥 먹고 차 마시니까 저녁 여덟 시, 이동하면 아홉 시는 되어야 할 텐데 술도 안 마시는 친구들과 어딜 가서 놀까 하다가 안 가본 재즈바에 가볼까 싶었다.

한가한 프리랜서인 데다가 다음날 약속도 없었으니 알아서 놀아준다는 친구들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신나게 놀아야지!


친구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와서 각자 스마트폰을 붙잡고 밤 시간 제주 핫플레이스 검색에 바로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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