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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Dec 22. 2023

우리 3차 갈까요?

한밤중까지 친구들과 거실에서 노닥거리기


네 번째 집을 봤던 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스타벅스로 몰려가서 커피까지 마셨건만 친구들과 헤어져서 집으로 가기가 아쉬웠다.




제주에서 만난 친구 두 명과 같이 살아보기로, 근사한 이층 집을 찾아서 독서를 사랑하는 여자 셋이 이상적인 제주살이를 해보자며 의기투합했건만 막상 알아보니 근사한 집은커녕 그럭저럭 괜찮은 집도 찾을 수가 없어서 기운 빠지고 속상하던 참이었다.


나와 친구 둘은 모두 개성이 뚜렷한 성인들이었다.

온갖 걱정과 반대를 물리치고 자신이 원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 기어이 제주까지 찾아왔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휘둘리지 않는 기질이었다.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걸로 인해 마음 상해봤자 본인만 손해라는 것도 잘 아는 쿨한 성격들이었다.     


지난주 추석 연휴에 이어서 다음 날 월요일도 한글날.

직장인들에게는 한 시간도 흘려보내기 아까운 2023년의 마지막 황금연휴였다.

게다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저녁 시간에 현재를 즐길 수 있는데도 당장 집 못 구해서 속상하다며 망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막상 가려니까

무려 핫플레이스 관광지 제주인데도

늦게까지 영업하는 술집이나 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가게마다 영업종료였거나 지구의 정 반대편 끝처럼 느껴지는 제주도 반대편에 있었다.     


- 우리, 배는 부르니까 치킨 포장해서 유랑 언니네 집 가서 놀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명랑하고 소소하게 잘 노는 K의 제안이 반가웠다.

K는 그날 저녁밥과 커피는 언니들이 샀으니 치킨은 꼭 자기가 사서 가겠다며 먼저들 집으로 가 있으라면서 일어났다. 역시나 든든한 내 친구들!


제주에서 만난 여자 셋은 며칠째 집은 못 구하고 취미로 시작한 그림 그리기도 잘 안되고, 마음 한구석이 휑하니 허전한 채로 서귀포 중산간 오두막집 거실에 모였다.     

캄캄한 어둠 속, 귤밭 한가운데 위치한 단층 목조주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애교 넘치는 보더콜리가 낯선 손님들을 보고 기뻐서 펄쩍펄쩍 뛰어왔다. 마당개라 긴 털이 꼬질꼬질했건만 개를 사랑하는 친구들은 아량곳 않고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보더콜리를 귀여워하며 쓰다듬어주었다.     


- 그날 무슨 대화를 했더라?     


특별히 기억나는 내용은 없다. 치킨은 혼자 먹는 것보다야 맛있었겠지만 치킨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그런 맛이었다. K는 알코올 분해효소가 전혀 없어서 술이라곤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했고 Y도 제주시까지 운전해서 가야 한다며 음료수와 콜라만 마셨다.     


제주에 내려온 지 이십 개월째.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고 할 일도 없는 제주에서 책 읽고 글 쓰는 게 바라는 전부였건만 운 좋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재택근무 일도 하고 친구들과 집을 구해서 일 년간 살아볼 궁리까지 하게 된 그 모든 과정이.     


기왕지사 제주에서 사는 거, 한 번쯤 보헤미안처럼 멋진 친구들과 그림 같은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사는 게 원래 그런 게 아닐까.

실패해도 또 기대를 갖는 것.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고 좋아하는 것들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채워가는 것.


그 모든 결심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집은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들의 열기도 식어가는 게 보였다. 이러다가 흐지부지될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뭘 어쩌겠나. 될 일이면 될 테고 안될 일이면 안 될 테니 그저 인연에 맡겨야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세상에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정처 없는 생각들은 운명론자에 가깝게 흘러가고 있었다.     


적막하고 심심한 밤이 말없이 지나갔다.

그 순간이 우리 세 사람 우정이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허심탄회하게 속속들이 속사정을 털어놓고 더 가까워져 봤자 다 부질없었다.

사는 건 원래 그런 건지도.     


소소하게 수다를 떨며 제주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독서모임의 또 다른 멤버였던 J는 헤어졌던 남자친구를 다시 만난 후로 모임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걸 보니 깨가 쏟아지게 잘 사는 것 같다느니, 청년 사업가 H는 내년 초에 육지로 돌아간다니 아쉽다고.

문득 K도 연말에 연봉협상이 잘 안 되면 제주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뉴욕에 있던 시절에 비해서 서울로 오면서 반토막 났던 연봉이 제주도 와서는 반의 반 수준으로 줄었는데 여기서 더 줄면 도리가 있겠냐면서.

나와 Y는 당장 제주를 떠날 계획은 없었지만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마당개는 베란다 유리문에 꼭 붙어 앉아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세 여자도 유리문 너머에 앉아있는 잘생긴 보더콜리를 쳐다보았다.

간식을 먹다가 한 사람씩 유리문을 열고 보더콜리를 쓰다듬다가 했다.

대화는 자꾸 겉돌았다.

본인이 먼저 꺼내기 전에는 더 깊은 사연을 묻지 않는 게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 간의 불문율이었다.     


- 나는 진짜로 친구들과 같이 살고 싶은 건가.   

  

하하 호호 웃으면서 온기와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집은 신기루일 뿐, 지속가능한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왜 나와 살고 싶어 하는 걸까.     

사는데 정답이란 없었다. 그렇지만 젊은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더 현명하고 강인해 보였다.

나는 그저 외롭고 불안해서 남에게 의지하고 빌붙고 싶은지도 몰랐다.

운 좋게 괜찮은 집을 구하더라도 불편하게 살다가 헤어질 때 또 힘들어할지도 몰랐다.

나는 늘 타인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하는 습관이 있으니까.     


스물여섯에 만난 남자친구와 서른한 살에 결혼해서 이십 년 동안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 제주까지 내려와서 이혼했다.

나는 그가 원하는 아내가 되지 못했는데도

그에게 내가 원하던 이상적인 남편이 되어주기를 원했다. 우리는 둘 다 불행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행복도 원래부터 없었다.

외로움과 한 몸인 자유가, 고독이 있을 뿐이었다.




제주의 밤과 낮 동안에, 숲과 바람과 바다를 혼자서 바라보는 게 좋았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행복이란 햇살 눈부신 카페에서 책수다를 떨고 저녁을 먹으러 몰려갔던 우연한 시간들 뿐.

텅 빈 집에서 혼자 일기를 쓰고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마침내 가벼워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타인들과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건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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