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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랑 Dec 29. 2023

딱 한 번 나타났던 괜찮은 집

먼저 채 가는 사람이 임자라지만 우리에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여태 만나본 이성 중에

지금 생각해도 괜찮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지 않았나요?


나무랄 데 없는 외모에 성격, 조건도 좋은데

심지어 나에게 호감까지 보였던 사람이 말이에요.     




친구들과 같이 살 집을 찾고 또 찾자, 마침내 바라던 집 한 채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답니다.


방이 네 개, 화장실 세 개, 넓은 정원이 있고 먼바다까지 보이는 신축 3년 차 집이었어요. 제주시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라서 출퇴근도 가능했어요.


이번에도 다 같이 집을 보러 가자고 인터넷 매물 링크를 단톡방에 올렸어요.

그런데 K가 이번 주말에는 시간이 안된다고 했답니다. K와는 일단 목요일 저녁 평일에 보기로 했어요.

퇴근하고 달려오면 일곱 시 전에는 도착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Y는 칼퇴근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집을 보는 건 밝을 때 해야만 한다며 그 이틀 후, 토요일 낮에 따로 만나서 보기로 했어요.     


저는 프리랜서라서 시간적 여유도 있거니와 하루빨리 집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부동산 중개인 아저씨와 목요일 저녁 여섯 시에 미리 만나기로 했어요. 아직 초가을이라 일곱 시 이후에도 해거름이 남아 있을 무렵이었어요.

매물로 나온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주변이 대낮처럼 환했답니다.     


애월에 위치한 대형 타운하우스 단지에 인접해서 따로 네 채를 나란히 지은 미니 타운하우스 중 한 채였어요. 딱히 흠을 잡을 데 없을만큼 무척 괜찮은 집이었답니다.

제주의 고속도로라는 평화로에서 오백미터 정도만 올라오면 되므로 제주시까지 이동하기에도 편리했고 깔끔한 신축이었어요. 마당도 넓은 편이었는데 잘 손질된 잔디밭에 나가보니 먼바다가 파랗게 보였어요. 종려나무와 먼나무까지 몇 그루 있었고요.

 

실내 면적도 대부분의 타운하우스가 실평수 25평인데 반해 이곳은 38평으로 훨씬 더 넓었어요.

방은 네 개였는데, 일 층에 큰 방 하나와 작은방 하나, 이 층에도 큰 방 하나와 작은 방 하나가 있었어요.

1층 큰 방에는 커다란 붙박이장과 파우더룸, 화장실이 딸려 있었고, 2층의 큰 방에도 옷과 이불을 수납할 수 있는 붙박이장이 있었어요.

나머지 방 두 개는 크기가 작았지만 작은 방을 써야 하는 사람은 작은 방 두 개를 다 쓰면 될 거 같았어요.

침실 하나 서재 겸 드레스룸 하나로요.

화장실은 세 개였는데 일 이층 중앙에 하나씩 있었고 가장 일층 큰 침실에 딸린 화장실이 있었어요.

세 개의 화장실이 모두 넉넉한 크기에 샤워부스도 딸려 있어서 하나씩 차지하면 될 거 같았답니다.

주차공간도 충분했어요.

집 앞 전용주차구역에 두 대를 세울 수 있었고 바로 앞 길가에도 몇 대나 더 세울 수 있었어요.

보증금 2000만 원에 연세 1800만 원의 임대가격도 적당한 수준이었답니다.


단 한 가지, 유일한 단점은 가전과 가구가 없다는 거였어요.

에어컨은 빌트인으로 갖춰져 있었고 전기 인덕션도 일층과 이층 주방에 모두 설치되어 있었지만 소파나 식탁, 침대는 물론이고 냉장고와 세탁기, TV도 없었지요.     


집을 본 우리 세 명은 신기하게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까,

가구 가전이 다 갖춰져 있는 풀옵션이기만 하다면 당장 계약을 하겠다고!

그런데 바로 그 가구와 가전이 없는 거였어요.

     

풀옵션이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냉장고, 세탁기, 티브이, 침대, 소파, 식탁을 사야 했어요.

연세가 1800만원니까 세 명이 각자 600만 원. 최대 800만 원까지로 잡았던 예산에 비해서 여유가 있기는 했어요. 티브이는 제가 하나 있고 침대는 각자 마음에 드는 걸로 사면되니까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소파와 식탁을 사면 되는 거였어요. 대충 다 합쳐서 200~400만 원선에서 해결될 거 같으므로 나눠서 내면 될 거였어요.


근데 가구나 가전에 대한 취향이 서로 다를 텐데

그걸 어떻게 조율하지?


그게 처음 든 의문이자 걱정이었어요.

제 취향은 저렴한 기본형을 선호하는 쪽이었어요.

냉장고나 세탁기도 브랜드 제품 중에서 가장 저렴한 기본형 화이트톤이면 충분했어요.

가구도 마켓비나 모던하우스에서도 세일 제품을 고를 게 뻔했어요.

돈을 펑펑 써본 적이 없었고 쓸 줄도 모를뿐더러, 물건에 애착을 갖는 걸 싫어했거든요.

제주에 올 때 육지에 있던 물건들도 다 버리고 최소한의 짐만 가져왔고 앞으로는 차 한 대에 실을 수 있을 만큼만 갖기로 했어요.

하지만 친구들 생각은 어떨지 몰랐답니다.

친구들은 저보다 젊고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으므로 취향이 저와 다르겠지요.

얼마쯤 맞춰줄 용의는 저도 있었어요. 일이백만 원 더 쓰고 고급진 가구와 가전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았으니까요.


헌데 그 과정이 걱정이었어요.

가전과 가구를 누가 알아보고 의견 조율을 누가 어떻게 할지, 그리고 일 년 후 따로 갈 길을 간다면 그걸 어떻게 처분할지도 골치가 아팠어요.


친구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나봐요.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K는 언제까지 제주도에 있을지도 기약이 없었어요. 당장 다음 달에 연봉협상이 잘 안 되면 떠나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답니다.      

부동산 중개인은 집을 보고 간 사람이 또 있다면서 마음에 들면 계약을 서둘러야 한다고 했어요.


고민 끝에 다음날 일요일 정오까지 투표를 하자고 했지요.

셋 다 찬성이면 그다음 날, 월요일에 제가 대표로 부동산에 가서 당장 계약을 하기로 말이에요.     


그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보냈어요.

새벽까지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또 인터넷 부동산을 뒤지다가 잔디 마당이 넓은 초소형 단독주택 매물을 보았답니다.

일층에 거실과 침실 하나, 이층에 다락방이 있는 집이었어요.

보증금 천만 원에 연세 천만 원.

집에 있는 시간이 많고 재택근무 일도 하는 저에게 집이 어떤 환경인가는 무척이나 중요했어요. 내심 월세는 백만 원까지로 정하고 있던 참이었고요.


잠 못 이루던 일요일 새벽에 무거운 마음으로 단톡방에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놨어요.     

저는 월요일에 초소형 단독주택에 한 번 가본 후에 마음을 결정하겠다고요.


같이 살자고 한 제안이 무척 고맙기도 하고 실제로 같이 살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가전과 가구를 다 구하고 서로 맞춰서 살다가 나중에 다시 처분해야 하는 게 두렵기도 하다고.


일요일 아침부터 눈 뜨고 톡을 확인한 친구들도 하나 둘 말했지요.

그 마음에 격하게 공감이 간다고요.




집 보느라 몇 날 며칠을 실컷 끌고 다니고 나서 이제 와서 파토를 내나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하지만 이해심 많은 친구들은 일단은 초소형 단독주택에 한번 가보라고, 그리고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다시 풀옵션 집으로 알아봐도 되지 않겠냐고 너그럽게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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