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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수 Sep 14. 2023

1895년 을미사변  

명성황후 팩션사

시민들이 노도(怒濤)로 일어나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내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위대한 민의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춰야 할 듯합니다. 한편으로는 벌건 대낮에 어찌하여 이런 맹랑한 지경이 되었는지 냉정하게 되짚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신성한 민주 대의 기구를 농단했으니 직무 정지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엄중한 역사적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먼저 수많은 의사(義士)의 희생으로 점철된 역사의 씨줄이 어디에서부터 꼬였는지 낱낱이 되짚어 보았으면 합니다.     

외척 세력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이 나라 강토가 청일의 전쟁터로 쑥대밭이 되도록 만든 120년 전 민왕후의 후안무치를 이 시대에 다시 보는 일은 참으로 고역이었습니다. 비선 실세가 국정을 농단하고 군사 기밀과 시설을 외세에 내주는 꼴을 보며 한 세기가 흐르는 동안 이 나라 역사는 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것만으로도 죗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역사 서술까지 간섭하려고 드는 뻔뻔한 행태에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저들이 우리 역사 인식을 왜 트집 잡고 있는지, 더 나아가 시대정신에 발맞추려면 우리 역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민비가 환생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걸 보고 좀 당혹스러웠습니다. 특히 일본의 언론매체들이 대통령을 민비에 빗대며 조롱할 때에는 참 난감했습니다. 민왕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익히 들어온 바라 낯설다고 할 수 없는데도 왠지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아마 우리 세대는 민왕후에 대해 엇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을 겁니다. ‘민비’는 일본놈들이 우리 역사를 깔보며 쓰는 호칭이니 쓰지 말고 ‘명성황후’로 불러야 한다고 다들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선입견은 드라마 [명성황후]에 의해 자리잡았을 겁니다. 2001년부터 2년에 걸쳐 124회로 방영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작품으로 ‘명성황후’ 이미지를 우리 뇌리 속에 새겨 넣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 국모(國母– KBS 드라마 [명성황후] 2001     

드라마 [명성황후] OST <나 가거든> 명성황후 시해 장면

드라마 [명성황후]는 외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국운을 개척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으로 명성황후를 그려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일본 낭인들의 칼날 앞에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는 조선의 국모다” 소리치는 명성황후 일갈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드라마 [명성황후]는 민비에 대한 대중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많이 바꾸어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논란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명성황후가 나라를 위하기보다 민씨 집안의 사리사욕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는 평가가 주류라면, 이런 부정적 평가는 일본 사학계의 주장을 답습하는 꼴이라며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었습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접하면 어느 것이 역사적 진실인지 고민을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다른 역사 해석의 근거가 되는 사실(팩트)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까요. 결정적으로 명성황후는 일본놈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이 나라를 짓밟은 자들이 그렇게 무도한 짓으로 명성황후를 제거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명성황후가 조선의 개방 개화에 뜻을 두었다는 건 여러 사료에서 확인됩니다. 그러면서도 다수 개화파들처럼 친일로 기울지 않았다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한 셈이지 않습니까.     

명성황후의 개방노선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쇄국노선과 부딪치면서 많은 분란이 일어납니다. 흥선대원군이 실질적으로 조정을 장악하고 세도정치 척결과 왕권 강화를 꾀하자 기득권 세력이었던 유림이 반발하고 결국 유림의 대표 ‘최익현’의 상소로 실권(失權)하게 됩니다. 고종 친정 체제가 들어서면서 바로 일어난 운요호 사건으로 조선의 대외정책 기조가 크게 바뀝니다.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개화파 일꾼들을 일본 사절단으로 파견하는 등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흥선대원군을 몰아냈던 유림 세력들은 대일 수교를 반대하며 명성황후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다며 비난하고 나섭니다. 조선은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유림 세력과 개화개방을 주장하는 개화파, 봉건 수구세력 척결과 패정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어 갔고 명성황후는 난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 일본, 청나라,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칩니다.     

명성황후의 개방정책에 대한 불만은 임오군란으로 터져 나옵니다. 신식군대를 우대하며 구식군을 굶어죽게 한다는 불만은 명성황후에 대한 원한으로 터져나와 군인들은 궐기하자마자 궁궐로 뛰어들어 명성황후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중전은 변복을 하고 아슬아슬하게 궁궐을 빠져나가 목숨을 보전하지만 대원군은 곧장 중전이 죽었으니 국상을 치르라고 명합니다. 조선 내정 간섭의 기회만 엿보고 있던 일본은 좋은 기회를 만났다며 잽싸게 제물포로 군함을 보내 위협합니다. 대원군은 일본과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하지만 중전은 고종에게 밀사를 보내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설득합니다. 조대비(신정왕후)가 청국에 사신을 보내 청군의 조선 파병을 요청하고 조선으로 진주해온 청군은 대원군을 납치해 청국으로 끌고 갑니다. 궁궐로 돌아온 명성황후는 청국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을 찾다가 일본 세력을 끌어들인 김옥균의 갑신정변 계획에 동조하게 됩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일당이 민씨 집안 대신들을 마구 죽이자 고종과 중전은 이들을 의심하게 되고 청군에 도움을 요청하여 개화파의 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립니다. 청나라와 일본은 ‘천진조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키고 대원군은 귀국하게 됩니다. 청나라의 ‘원세개’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세자로 세우고 고종을 폐위시키자며 대원군을 꼬드기고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 갈등은 극한으로 치닫습니다. 대원군의 침소에서 폭탄이 터지는가 하면 세자의 아이를 임신한 나인이 독살당하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외세에 맞서기 위해 단합하려고 노력하지만 청나라와 일본의 간계에 의해 내분이 끊이질 않았고 백성들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결국 동학농민군이 궐기하여 조선은 격동의 갑오년을 맞이합니다. 청국과 일본이 군대를 보내어 이 나라 강토는 전쟁터가 되고 명성황후는 처참하게 시해되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이 나라 존명(存命)을 보존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명성황후의 분투와 고뇌를 그리고 있는데 이를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에서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청군 파견을 요청한 사람을 조대비로 그리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 나가 있던 ‘어윤중, 김윤식’이 청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이들은 민씨 집안의 ‘민영익’과 함께 한 온건개화파 인사로서 명성황후의 손아귀 안에 있었으니 청군 파병은 명성황후의 뜻이라고 봐야 합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의 출병을 요청했던 명성황후는 두 해 뒤 갑신정변 때에는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일에 개입합니다. 참 어쩌면 이토록 정신 못 차리게 오락가락 할 수 있는지 도대체 믿기지가 않는데, 갑신정변 주모자 김옥균의 [갑신일록]에 그렇게 기록이 남아 있으니 모르쇠 할 수도 없습니다.     

명성황후는 외세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청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워낙 우리 국력이 약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자주(自主), 자강(自强)을 위한 그 어떤 노력도 없이 외교에 골몰하는 게 온당한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조선 견문록]을 쓴 ‘언더우드’ 여사는 결혼할 때 명성황후로부터 축의금을 100만 냥이나 받았다고 합니다. 지금 돈으로 500억 원, 당시 나라 예산의 20%를 축의금으로 받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으로 도피했을 때 만난 무당을 환궁할 때 데리고 와 ‘진령군’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더불어 국사를 의논했다고 하니,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나라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골몰했다느니 하는 말이 다 허무맹랑해 보입니다.     


할아버지 세대 민비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65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각국 외교관 초청 연회 장면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민비’라는 호칭이 낯익을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명성황후’는 죽고 나서 추존된 호칭이고 ‘비(妃)’라는 말도 극존칭이니 만큼 ‘민비’니 ‘명성황후’니 하는 논란이 참 쓸데없다 싶기도 하지만 이 호칭 논쟁에는 참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고, 우리 역사 인식의 전환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라 할 만합니다. 대체로 우리 앞 세대 분들은 다들 ‘민비’라고 불렀는데 우리 세대에 들어 ‘명성황후’라는 호칭이 일반화 된 것 같습니다. 1959년 영화 [대원군과 민비, 1965년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1974년 MBC 드라마 [민비] 등 많은 작품이 ‘민비’를 그렸습니다. 이 중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민비와 대원군의 권력 투쟁을 중심으로 난세를 그려낸 영화입니다.     

제목에 ‘청일전쟁’이 들어가 있어 좀 넓게 그 시대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봤는데 영화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암투를 그려낸 추리물이었습니다. 대원군이 민비를 헤치려고 암살자 ‘조승구’를 보내지만 얼토당토않게 민비와 ‘조승구’는 사랑에 빠집니다. 임오군란 때 ‘조승구’의 도움으로 민비는 궁궐에서 탈출하여 목숨을 구하고 청나라의 파병을 주선합니다. 이렇게 들어온 청군에게 흥선대원군은 납치당하고 환궁한 민비가 조정을 주무르게 됩니다. 조선에 진주해 들어와 있는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이 날로 심해지자 민비는 러시아에 줄을 대려고 하다가 동학동민군이 궐기하자 민비는 또다시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합니다. 신하들이 이러다간 조선 반도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될 수도 있다고 진언하는데도 저희들끼리 싸우도록 놔두자며 밀어붙입니다. 청일전쟁 때 유린당한 조선 백성들을 생각하면 이 대목에서 벌컥 화가 치밀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민비는 일본 공사에게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해야 한다고 부추기지만 뒤로는 자신이 삼국간섭을 주선하여 요동반도를 다시 내놓게 만들었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일본은 민비의 농간으로 요동반도를 잃게 되었다고 분개하며 왕비를 제거하기 위해 암살자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암살자가 바로 민비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탈출해 가있던 ‘조승구’입니다. ‘조승구’ 인물 설정은 너무 황당합니다. 대원군의 수하로 명성황후를 암살하려고 접근하는 자객이었다가 임오군란 때에는 명성황후를 탈출시켜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과 친구로 지내다가 을미사변 때 민비 시해를 위해 일본이 보낸 자객으로 그려집니다.      

‘조승구’는 임오군란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키고, 동학혁명 진압의 공을 세워 훈련대장이 되었다가 명성황후 시해 때에는 광화문을 사수하다 사망한 실존인물 ‘홍계훈’을 본 따서 그렸을 테지만 사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고 허구적 인물로서도 너무 개연성 없이 황당하게 그려졌습니다. 민비가 친일, 친청, 친러로 오락가락 하며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분열적 양상을 보인 것을 풍자하기 위한 의도로 ‘조승구’라는 인물도 이렇게 중구난방이 된 것은 아닐까 하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하다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시대는 요령부득 난세였습니다.


젊은 세대 민자영 불꽃처럼 나비처럼』 2009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임오군란 궁궐 탈출 장면


요즘 젊은이들은 명성황후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아마 이 시대 젊은이들의 감성에 맞는 팩션 이미지일 겁니다. 이 작품의 원작자는 ‘야설록’이라는 필명을 쓰는 무협지 작가입니다. ‘야설록’은 ‘이현세’ 만화의 스토리를 쓰는 등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작가로 유명하기는 한데 우리 세대 관점으로는 논란이 많은 역사 이야기를 무협소설처럼 풀어내는 게 좀 꺼림칙하기도 할 겁니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무협지 같은 대목이 많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밀명을 받고 민황후를 암살하려고 하는 ‘뇌전’이라는 검객과 민황후의 호위무사 ‘무명’의 검투 장면은 아무런 역사적 근거 없이 그려낸 판타지입니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구식군대가 궁궐을 쳐들어갈 때 한양 도성의 가난한 백성들이 일본 공사관과 민황후의 오빠 ‘민겸호’의 집을 불태우는 등 구식군대의 궐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게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런데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이를 정적 암살 음모로 그리고 있으니 난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사주하여 민황후의 친정집을 폭파시키고 친정어머니를 죽이는 등 과격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의 정치적 대립 구도를 반영한 것이기는 합니다. 신식군대 별기군을 만들면서 홀대를 받던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은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쇄국파와 민씨 집안이 주도한 개화파 사이의 갈등으로 일어난 변란이라고 보는 게 정설인데 영화는 이를 과장되게 빗댄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민황후를 연모하여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호위무사 ‘무명’은 실존인물 홍계훈을 본 따서 그려낸 인물인데, 영화에서는 민자영(민황후의 본명)이 왕비로 간택될 때 쯤 고향에서 ‘무명’을 처음 만나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민황후를 애틋하게 연모하는 ‘무명’은 임오군란 때 민황후가 궐 밖으로 피신할 때 그녀를 등에 업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한양 궁궐을 빠져나가 경기도 장호원까지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단 둘이 동행을 한 건 사실이라고 하니 둘 사이에 남녀 간의 연정이 싹튼 것으로 상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을미사변 때 궁궐로 난입한 일본 낭인들에 맞서 싸우다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이를 위해 초개와 같이 헌신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이기는 합니다. 그냥 그렇게 공감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히 험 잡는다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을 생각하면 그냥 덮어둘 수만도 없습니다. 홍계훈은 동학농민군 토벌대를 이끈 장수였습니다. 조정이 당파싸움으로 사분오열되어 있었고 나라가 외세의 각축장이 되어 버린 마당이니 일개 장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싶을 수도 있지만 역사의식 없는 그의 순정이 추해 보이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세대차이 난다고 고개를 돌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함께 애기를 나눌 수 있으니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세대가 다르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을 보는 제 눈이 많이 달라졌다는 걸 자주 느끼기도 합니다. 함부로 맞다 틀리다 가르지 말고 다름이 공존하는 지혜를 터득하는 싶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고루해지는 건 아닌지 경계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시각은 달라질 수 있지만 팩트가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겠지만 왜곡하거나 오도하는 일은 용납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세대 차이를 불문하고 광장으로 모여든 이 시대의 양심이 명성황후 팩션사처럼 후세에 진실을 전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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