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바로 다음 해에 일본군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전과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한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에 대해서는 어린애들도 잘 압니다. 그런데 이 혁혁한 독립전쟁을 이끈 분이 실제로는 홍범도 장군이었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일제에 맞서 싸우며 목숨까지 바친 독립투사들을 좌우 이념 갈등으로 분열시키며 역사를 왜곡하는 후손들의 후안무치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강대국의 냉전 갈등 틈바구니에서 분단의 비극을 자초한 모리배들을 좌시할 수는 없습니다.
연변 조선인과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발굴한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토대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실상이 많이 밝혀졌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수하에 있었던 이범석의 회고록 [우등불]에만 기대어 우리가 청산리 전투에 대해 잘못 알게 된 측면이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 역사 연구를 이끈 연변대학교 박창욱 교수는 “이범석 씨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담당한 국가 수뇌의 신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의 공로를 과대평가하고 홍범도와 그 연합부대의 공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도리어 홍범도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고까지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청산리 전투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장군은 김좌진이 아니라 홍범도였으며 청산리 전투의 마지막 격전장 어랑촌 전투에서 북로군정서는 거의 괴멸하다시피 했고 홍범도 장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김좌진 장군은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역사는 왜 이렇게 왜곡되고 말았을까요.
홍범도 장군은 노비 출신에다 사냥꾼이라는 천민 신분으로 조국 독립에 투신했으며 독립군 부대를 꾸리면서 주둔지 주변 민가에 어떤 민폐도 끼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교 제복을 입지 않고 장수와 군졸의 구분을 마뜩찮게 생각하는 분으로 어딜 가나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청산리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는 러시아로 넘어가서도 찬밥 신세가 되고 맙니다. 소비에트 공산군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독립군 부대는 볼셰비키 공산군의 공격을 받아 다수가 죽거나 포로가 되고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북간도로 넘어오지만 결국 북로군정서 서일 총재는 통한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고 김좌진 장군은 간도 조선인 민중의 미움을 사 동포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홍범도 장군의 말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장군은 볼셰비키 공산당에 입당하여 조선 독립군의 연합을 위해 노력하지만 자유시 참변을 막지 못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레닌 사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합니다.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조선 최고의 혁명 전사로 떠받들어졌던 명예는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수위로 노년을 보내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합니다.
역사의 진실이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요. 전민족 대동단결을 위해 강력한 구심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굶주리고 있는 민중들에게는 탐관오리의 학정이나 제국주의 수탈이나 그게 그것으로 다르지 않을 수 있거든요. 민족 해방이나 민중 해방이 따로 갈 수 없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따지는 것은 역사의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라 되새기게 됩니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친 숭고한 희생을 지워버리는 역사 서술은 우리 역사를 옹졸하게 만들 뿐입니다. 분단과 이념 대립으로 인해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희생마져 갈갈이 찢기고 마는 절름발이 역사의 통한(痛恨)을 어찌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