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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수 Sep 14. 2023

1910년 한일합방? 경술국치?

-  조선은 왜 일본한테 망하게 되었을까

요즘 학생들은 ‘경술국치’라는 말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학생일 때에는 ‘한일합방’으로 배웠는데 요즘 학생들은 ‘한일합병’으로 배웁니다. ‘합방(合邦)’은 ‘나라를 합치다’는 의미인데 엄밀하게 말하면 일본 제국의 제후국이 된다는 의미이니 쓰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그래서 ‘합병(合倂)’으로 고쳐 쓰게 되었는데 ‘대등하게 합치다’는 의미를 가진 이 말도 꺼림칙합니다. 사실 그대로 나라가 망한 날이니 국치(國恥)일, 참으로 수치스러운 날이라 부르는 게 맞다고 봅니다.     

조선은 왜 일본한테 망하게 되었을까요?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해 개방이 되어 제국주의 영향을 받게 되니 선진 문물을 익혀 전근대 조선을 넘보게 된 것이라는 게 상식이겠지요. 그런데 그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운 게 참 많습니다. 나라 밖은 바야흐로 격동의 시대였는데 조선은 어떤 연유로 눈뜬장님이 되어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고 있었을까요. 3세기 전 임진년에 이미 겪었던 일이라 웬만하면 일본 속사정을 눈여겨봐야 할 텐데 어떻게 마땅한 대비 없이 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걸까요.       

도래인 ‘도고 시게노리’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이 조선을 넘볼 당시의 일본 속사정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도래인’이라는 말이 참 생소한데 일본에서는 자국의 역사인식과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는 민감한 개념입니다. 일본이 조선에서 건너온 도래인(渡來人)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으니 민감할 수밖에 없겠지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 팽창정책을 세울 때 주도적 역할을 한 ‘도고 시게노리’라는 자가 조선인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망국의 내재적 원인을 보다 깊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도래인 문제는 역사학계에서 여러 각도로 조명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서는 일체 언급이 없어서 한반도 근대사 인식을 온전치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근대 개혁을 촉발시킨 메이지유신이 규슈 지방, 특히 가고시마 무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가고시마는 조선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정착하며 고려 문화를 꽃피운 곳입니다. 그렇다면 일본 근대화의 뿌리는 우리 민족이라고 봐야 하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우린 너무 모릅니다. 저 또한 별 관심을 갖지 않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일본 도래인의 역사를 그린 팩션물을 만나면서 역사관의 지평이 확 넓어지는 듯했습니다.     

김용필의 단편 역사소설 [도래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 내각에서 조선인 후손으로 외무장관까지 지낸 ‘도고 시게노리’라는 실존 인물 이야기입니다. ‘정한론’을 연구하는 한국인 사학자 ‘박설’이 ‘도고 시게노리’의 손녀 ‘도고 케리’를 만나 그들의 민족애를 접하면서 상념에 빠져듭니다. 조선인의 후예로서 정한론(한국 정벌론)을 주도한 그들이 조국 조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뿐더러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전쟁을 생각하면 원한에 사무칩니다. 한편으로는 고려가 폐망하고 건너간 고려 도래인과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래인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어떻게든 조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 그 마음을 모르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일본이 동조동근(同祖同根) 운운하며 대륙 침략을 획책할 때 이 나라 지도자들은 무얼 했느냐 따져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시아 각처로 이산된 동족에 대한 일말의 관심과 소통이 있었다면 나라 밖 사정에 이렇게 깜깜할 수가 없었을 텐데, 집안싸움으로 날 세는 줄도 몰랐으니 참 한심하달 밖에요. 임진왜란 때에도 왜놈들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누누이 진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놈에 파벌 싸움에 망조가 들었는데 그 역사의 교훈을 어찌 그리 쉬 잊고 또 거들을 내느냐 말입니다. 이 땅에는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그리 없었던가요.     

일본에서 메이지 신정권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내란이라 할 만큼 정변의 격랑이 일었는데 조선 조정은 이를 몰랐을까요. 메이지 정권이 세워지고 근 10년 만에 그 파고(1875년 운요호 사건)가 한반도에 와 닿을 동안 이 땅의 위정자들은 뭘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란한 심정으로 뒤척일 때 만난 의병항쟁 대하역사소설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구한말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상 대한제국 황실을 들여다봤으니 심란할 밖에요. 왜병을 격퇴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의병항쟁 못지않게 온 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방방곡곡을 들여다보면 이 땅에 온전한 사람 없다는 말 못 합니다. 


대표적인 의병장과 거병 지역


자랑스러운 의병 항쟁사에도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1894년 갑오농민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일본도 등달아 군대를 파견하여 농민군을 학살합니다. 조선 땅은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터가 되어 쑥대밭이 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유린합니다.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간섭으로 전리품 요동반도를 빼앗기자 일제는 친러 외교를 도모하던 명성황후를 시해(1895년)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참담한 나라 사정을 눈뜨고 볼 수 없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온 나라가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온 세상이 탈봉건 근대화로 치닫고 있는데 의병 항쟁 지사들 중에는 전근대적인 복벽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의병장들의 시대 인식 차이로 적전 분열하는 장면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유인석 의병대가 1896년 4월 제전전투에서 크게 패하는데 평민 출신 김백선 의병장이 양반 출신 안승우 의병장에게 증원군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면서 대오가 흩어지고 이에 패전의 책임 추궁을 했다가 오히려 의병장 유인석에 의해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의병장 유인석은 화서학파 이항로의 제자로 위정척사 사상을 갖고 있었으니 평민 출신이 양반에게 대드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림 출신 의병장들이 갖고 있는 봉건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병 부대 내의 신분 간의 갈등과 분열은 제천 전투 패배의 원인이었으며 의병항쟁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이원규는 이 분열상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위기에 빠져 수십 명의 부하를 잃은 김백선은 귀대하자마자 칼을 뽑아 들고 안승우를 치려 했다.

  “이 자식아, 네 눔이 장수냐? 이 쥐새끼만두 못한 필부야! 네 눔이 걸핏하면 앞세우는 <논어>에 견위수명(見危授命)이란 말이 있지 않느냐? 그 말이 네 눔의 안전을 지키라는 게 아니라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라는 뜻이 아니었더냐! 이 용렬한 눔, 목을 늘여 내 칼을 받아라!” 

  주위의 만류로 더 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유인석이 김백선을 꾸짖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네가 용맹이 있어 미천한 신분인데두 불구하구 장령으로 기용했거늘 어찌 이렇게 방자하단 말이냐?” 

  그러자 사대부 출신 장령들은 일제히 삿대질을 하며 나섰다.

  “이 나라에 어엿한 법도가 있거늘 저눔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구 패악을 부리는 겁니다. 저놈을 벌하소서.” 

  “양반에 대한 불경죄는 엄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유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내 적당한 벌을 내리겠네.” 

  그러자 하급 병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민들은 왜적과의 싸움에 반상(班常) 구별이 무엇이냐고 웅성거렸다.

                                        - 이원규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중 -     


근대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신분 차별을 철폐하고 공화주의로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전제가 되어야 했는데 의병항쟁을 이끌었던 위정척사파 지사들은 이런 신사조에 어두웠다는 것을 여러 역사적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림 출신 지사들이 평민 의병장들과 신분을 뛰어넘는 결사를 할 수 있었다면 조선 반외세 항쟁을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평민 의병장으로 김백선보다 더 유명한 신돌석 장군의 몰락도 참 애석하기 그지없고 홍범도 같은 대단한 의병장이 홀대를 받은 것도 참 안타까웠습니다.   


   

경북 영덕 신돌석 생가


신돌석은 1896년 19세의 어린 나이에 경북 영덕에서 의병 봉기에 가담하는데 그 탁월한 지략으로 영동지역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여 ‘태백산 호랑이’로 불렸던 평민 의병장입니다. 홍범도는 산포수 의병대를 꾸려 태백산맥을 주름잡으며 ‘백두산 호랑이 나는 호범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의병장이었습니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의병운동이 정미년(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에 항거하면서 위세가 드높아지고 전국의 의병대가 총결집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게 됩니다. 13도 총대장으로 ‘이인영’을 세우고 서울로 진격할 때 천민 신분 의병대장 신돌석과 홍범도는 지휘부에서 밀려나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총대장 이인영이 서울 진공 직전에 부친의 부고를 듣고 장례 치르러 낙향해 버리는 바람에 의병대 서울 진공은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의병 항쟁의 지도자들이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입니다. 소설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는 13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의 고루한 사고방식을 이렇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인영은 약간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 나라에 엄연히 법도가 있는데 상민이 어떻게 연합 창의군의 대장 된다는 말인가?”

  이인영은 말을 끊고 고개를 들어 그들 방문단을 모두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약간 곤혹스런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옛 동지였던 여러분이라 털어놓는 바이지만 어제 저녁 신돌석이가 자기 부대를 끌고 회군했소. 교남 창의 대장을 박정빈으로 바꾼 데 불만이 있었던 것이오.”

  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놀라움과 실망으로 앞이 캄캄했다. 신돌석은 어느 의병대보다도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의병장이었으며 삼남의 의병 중 민초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비중 큰 의병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더 말하지 않고 총대장의 지휘소를 나왔다. 이인영 초대장을 방문하고 느낀 것은 최고 지휘관이 고루함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었다. 

  이형재 참모관은 침침하게 흐린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아, 반상의 차별이 다시 철천의 한을 불러올지도 모르겠구나” 

                                                                     - 이원규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중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안하무인이 되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1905년 을사조약) 급기야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며 조선 군대를 강제 해산시킵니다. 구식 군대는 의병대에 결합하고 전국의 의병대가 총결집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는데 애석하게도 사대부들의 전근대적인 의식으로 좌절되고 맙니다. 후과는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남한 대토벌작전을 벌이는데 삼남지방 가가호호 이 잡듯이 뒤져서 장정들을 죄다 잡아 죽입니다. 끔찍한 살육으로 온 나라는 피바다가 되고 의병들은 산맥을 타고 북행하여 국경을 넘어 간도, 연해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렇게 초토화된 조선은 병합되고 밥니다.      

사색당파의 분열이 참혹한 임진왜란으로 귀결되었듯이 외척 간의 암투와 외세에 빌붙으려는 사대주의로 조선은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되고 말았으며 지식인들의 사대주의와 고답적인 의식은, 피지배 계급 민중이 구국 항쟁에 앞장서는 자랑스러운 민족 정체성을 구기고 말았습니다. 조선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자국 근대화를 이끌었으니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동경이 어떠했을지 어렴풋이 짐작이 됩니다. 그렇게 뛰어난 민족성을 갖고 있는 우리는 다들 잘나서 뭉치지 못하는 것인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조선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이 패배했다고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조선이 위대하고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앞으로 100년도 넘게 걸릴 것이다. 우리가 총칼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뿌리깊이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조선 민족은 서로 이간질하여 노예 같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보라! 조선은 진정 찬란하고 위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한 식민교육으로 말미암아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 투자들의 혼령은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며 친일 부역자들이 여전히 이 나라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아베 노부유키’가 망발을 했노라 장담하기 힘든 사정이 도처에 만연합니다. 우리 민족은 참 위대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까요. 눈을 부릅뜨지 않으면 그 참담한 비극이 되풀이됩니다. 정명가도 임진왜란, 대동아공영 경술국치와 너무나 닮은 작금의 한반도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나라 안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려인 조선족 디아스포라까지 전부 다 아우르는 민족 정체성 복원이 시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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