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혁명의 교훈 영화 [개벽]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전봉준 투쟁단’으로 결집하여 트랙터를 몰고 상경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이번에는 꼭 ‘우금치’ 고개를 넘어 광화문으로 갈 것이라며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한 달만에 시위대가 2백만으로 불어나고 온 나라가 ‘대통령 하야’를 외치며 달아오르면서 이번에는 정말 ‘우금치’ 고개를 넘을 수 있으리라 가슴이 뛰는데, 한편으로는 들끓는 정국이 어떻게 수습될지 다들 걱정이 많습니다. 120년 전 갑오년(1894)에 ‘우금치’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면서 좌절되고 만 갑오농민혁명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그 때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밥벌이도 수월찮을 텐데 이렇게 고된 발걸음을 마다하지 않는 것은 저들 부패한 권력자들의 농단을 더 이상 앉아서 지켜볼 수 없다는 분노 때문일 겁니다. 한 해 농사 뼈 빠지게 지어 키운 농작물을 걷지도 않고 그대로 갈아엎는 농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려오는데 그 분들은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는지……. 쌀값이 30년 전으로 폭락해 추수하는 게 오히려 손해인 판국인데 저들 소위 위정자들은 온갖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며 나라 살림을 거덜내고 있으니 이를 어찌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
120년 전 온 강토를 뒤흔들며 일어난 농민군의 서울 진격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 때 열화와 같은 기세로 농민군은 황토현을 넘어 전주성을 장악하였고 조정에서 보낸 관리와 담판을 벌여 집강소를 설치하는 등 전대미문의 지방 자치를 실현했습니다. 그러나 새 시대를 연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놈들이 조정을 집어삼키고 국정을 농단하자 농민군은 다시 일어나 왜놈을 치러 나섰지만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그 패배의 후과가 얼마나 끔직했던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국토는 왜군과 청군의 전쟁터로 쑥대밭이 되었고(청일전쟁) 궁궐에서 왕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당하는가 하면(을미사변) 국왕은 몰래 도망가는(아관파천) 비참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비참한 역사이지만 지금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혁명이 우금치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꼭 되짚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는 갑오혁명, 우리를 그 현장으로 데리고 가는 문학 작품이 여럿 있습니다. 영화로는 [개벽]이 있고 소설로는 송기숙의 [녹두장군]과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이 대작으로 손꼽힙니다. 이 두 작품은 대하소설이라 읽을 엄두를 내기 힘들 수 있는데 근래 황석영이 소설 [여울물 소리]를 냄으로써 보다 수월하게 120년 전 갑오혁명의 현장으로 가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화 한 편으로, 소설 한 권으로 우리를 한 세기 전 격동의 시대로 데려가 주는 작품이 있다는 게 너무 고맙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갑오년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녹두장군]과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하(大河)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분단의 시대에 남한의 [녹두장군]와 북한의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대하가 갑오년으로 흘러들어 한 줄기로 합치는 그 장관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게 될 것입니다.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 탄생에 깃든 아픈 사연만으로도 가슴이 울렁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 풍경> 등 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을 남긴 박태원은 한국전쟁 때 월북한 소설가입니다. 그가 북에서 죽기 직전에 쓴 작품이 [갑오농민전쟁]입니다.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남은 가족들한테서, 박태원이 뇌출혈로 두 번이나 쓰러져 혀까지 굳어져 버린 뒤에도 부인의 집필을 눈짓으로 이끌며 [갑오농민전쟁]을 마무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박태원의 최후가 황석영의 폐부를 깊이 파고들어 [여울물 소리]를 집필하게 된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갑오혁명은 참 쓰라린 기억이지만 그 기억을 되살린 작가들도 이렇듯 아픈 사연들을 갖고 있습니다.
갑오혁명은 남과 북이 만나 공감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시대적 과제를 달리 보는 지사(志士)들이 서로 소통하도록 이끌기도 합니다. 역사학계는 갑오년 사건을 ‘동학혁명’으로 부르기도 하고 ‘갑오농민전쟁’으로 부르기도 하는 등 의미 부여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만큼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뜻이겠지요. 갑오년으로 가보면 사관(史觀)에 따라 역사를 달리 볼 수 있다는 걸 바로 공감하게 됩니다. 갑오년 대사건을 ‘갑오농민전쟁’으로 그린 작품으로는 북한에서 나온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과 남한에서 나온 송기숙의 [녹두장군]을 손에 꼽을 수 있고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혁명’으로 그린 작품으로는 영화 [개벽]과 이돈화의 소설 [동학당]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두 작품을 같이 읽으면 역사를 보는 눈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를 보는 눈도 환하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갑오년 거사를 ‘동학혁명’으로 그린 작품은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철학으로까지 시각을 넓혀주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최근 ‘여성동학다큐소설’ 프로젝트로 13권의 소설이 나와 청소년들도 쉽게 동학혁명을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민족사상을 함께 나눌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입니까. 무엇보다 먼저 영화 ‘개벽’을 먼저 감상할 것을 추천합니다. 이 작품은 누구나 쉽게 감상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개벽』은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삶을 중심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각본을 써서 역사 공부뿐만 아니라 동학의 철학 사상을 공부하기에도 참 좋은 작품입니다.
갑오혁명의 과정을 찬찬히 되짚어가다 보면 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고 통한의 아픔에 휩싸이게 됩니다. 먼저 맞닥뜨리게 되는 비극은 1871년에 일어난 ‘이필제의 난’입니다. 최시형 교주과 이필제 접주의 의견 차이로 동학 운동이 큰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영화는 이필제가 최시형의 힘을 빌리기 위해 교조신원(동학 포교 공인) 탄원만 하겠다고 약속하고 거사 지령을 부탁하지만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무장 투쟁을 펼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필제 접주가 봉기를 재촉하자 해월이 "혁명이란 원한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뜻을 한데 모으기 위해서는 보조를 맞춰야 하는데 조급하게 뛰쳐나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울 노릇입니까.
이돈화의 소설 [동학당]은 이필제가 아버지를 죽인 관원들에게 원한이 사무쳐 과격한 노선을 고집하지만 나중에 부하들에게 해월 최시형 선생의 뜻을 따르라고 유언을 남기는 것으로 그리고 있고, 조중의가 쓴 소설 [망국]은 해월 선생이 온건파와 강경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신중하게 동원령을 내리는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영화 [개벽]이 그린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농민군의 급진적인 무장 투쟁이 동학 지도자들의 온건 노선과 마찰을 빚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과격하고 급진적인 이필제의 변란은 동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불러오고 맙니다. 수많은 농민들이 비적으로 처형을 당했으며 최시형은 ‘최보따리’로 불리며 30여 년을 거지 행색으로 방방곡곡을 숨어 다니게 됩니다. 조급한 모험주의가 일을 망쳤습니다.
두 번째로 맞닥뜨리게 되는 비극은 무장 투쟁에 대한 이견으로 남접과 북접이 분열되는 대목입니다. 영화에서는 보은 집회에서 동학교도들에게 전봉준 장군이 무장투쟁을 선동할 때 해월 선생이 반대하는 장면으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영화 [개벽]의 주제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썩을 대로 썩은 관리를 징치하는 일이 급선무이겠지만 외세가 물밀 듯 밀려들어 오면서 풍전등화의 위기 놓인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온 나라가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보은 집회에서 해월은 교조신원을 강조하며 고종이 보낸 ‘어윤중’과 협상하고자 하나 전봉준은 비타협 역성혁명 척왜양(외세 척결)을 주장하며 맞섭니다. 해월은 무장봉기가 일본놈들에게 조선 지배의 빌미만 줄 것이라 걱정하며 기포를 반대한 것입니다. 해월이 우려했던 비극이 실제로 일어나고 맙니다.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시키자 조정은 협상에 나서고 전주화약 후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지만 일본군이 삼남지방으로 출병하여 농민군 소탕에 나서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고 해월이 지휘하고 있는 북접도 이에 호응할 수밖에 없어 동학도 전체가 기포를 하지만 일본군의 신식 무기 앞에 추풍낙엽으로 쓰러지고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하여 봉기는 좌절되고 맙니다.
갑오년 봉기 1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때 청국과 일본의 개입으로 조정이 풍비박산이 나고 마는 뼈아픈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 이런 우를 범하게 되었을까요. 동학 봉기의 기본 테제라고 할 수 있는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 둘 중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하나로 합해야 진정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가 가능할진데 어찌하여 내 것이 먼저라고 고집을 부려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계급모순이 먼저다, 민족모순이 우선이다’ 하는 지금의 운동권 논란과 1세기 전의 ‘교조신원(敎祖伸寃)이 먼저냐 제폭구민(除暴救民)이 급선무냐’ 하는 논쟁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폭정을 일삼는 탐관오리를 타파(除暴)하는 일과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지키는(輔國) 일을 놓고 경중을 따지며 내부 분열을 자초한 뼈아픈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가닥이 잡힐 듯합니다. 한 뜻으로 손을 맞잡고 거사를 했던 민족 민중의 영웅들이 의견이 갈려 서로 신뢰하지 못하게 되면서 일을 그르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녹두장군과 해월은 결국 외세 앞잡이들에게 붙잡혀 처형되고 의암 손병희는 문명개화 노선으로 돌아서며 친일 논란까지 벌어졌습니다.
다시는 이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과 영광을 위해 한 몸 바치겠다는 숭고한 뜻은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고 오로지 제 손아귀에 든 권세만을 위해 외세를 등에 업은 자들이 이 위대한 촛불혁명을 짓밟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할 듯합니다. 촛불혁명이 우금치를 치달아 오르는 이 시대에 어떤 시각으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 이심전심으로 통하기를 바라며 한 치라도 우리의 이 숭고한 뜻이 갈라지도록 만드는 소영웅주의는 철저히 경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