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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수 Sep 14. 2023

1884년 갑신정변 자주 독립 근대국가 건설의 열망

안소영 장편소설 [갑신년의 세 친구]

  조선은 고옥(古屋)에 들어앉아 음풍농월하던 선비들 나라여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깜깜한 청맹과니였다고 자조적인 넋두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18세기 정조 집권기 때부터 조선을 근대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열정으로 뭉친 젊은 학자들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우리 근대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북학파입니다. 당시 집권 세력이 북벌론(청나라 정벌)을 밀어붙이고 있었으니 청나라에서 신문물을 배워 와야 한다는 ‘북학’은 꽤나 위험한 생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집권당 노론 벽파 가문의 박지원이 북학파를 이끈 행적은 개인의 영달을 스스로 거부한 헌신적인 충정에서 나온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정조가 죽고 북학파의 뜻은 좌절되었지만 그 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역사 발전의 씨앗이 됩니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사적 흐름에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세우고 혈맹을 맺어 거사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바로 북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게 역사 발전의 맥은 끈끈하게 이어져 내려왔지만 개화(開化) 혁신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조국 근대화의 열정만은 충만했지만 난세를 조망하기에는 혈기가 너무 앞섰던지 그들 젊은이들의 충정은 조선의 안마당을 외세의 각축장으로 내놓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신사상으로 개명(開明)한 젊은이들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일은 참으로 험난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위정척사 명분론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선비들은 개화파들이 국기를 문란하게 하며 나라를 오랑캐들에게 내주려고 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젊은 개화파들은 이들 유학자들의 명분과 의리라는 것은 중국을 받들어 섬기는 사대주의에 불과하며 조선이 자주 독립 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하루 바삐 조선이 청국으로부터 자립하고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맞섭니다. 


19세기말 동경 거리


19세기말 서울


  개화파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구미(유럽과 미국)로 나가 세계의 변화 동향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의 서울과 동경 거리 풍경만 봐도 조선이 얼마나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있었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일본을 둘러본 조선 젊은이들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을지 쉽게 짐작이 됩니다. 이들 젊은이들은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둘러보고 놀란 가슴을 열하일기 담아 조선에 전하려고 했던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아편전쟁으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벌여 적극적으로 개화에 나서고 일본 또한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 개혁에 나선 것을 목격하고 돌아온 그들은 조선 또한 하루 빨리 바깥 세상에 눈을 떠야 한다고 확신을 갖게 되고 그 열정과 결기로 급진 개화 쿠데타 갑신정변에 뛰어들었습니다.


헌법재판소 정원의 백송나무


  소설 [갑신년의 세 친구]는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가 박규수 대감의 사랑에 모여 공부하면서 세상에 눈 뜨고 결사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좌절하는 과정을 박진감 넘치게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은 이 친구들이 박규수 대감의 집에 모여드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박규수 대감의 집에는 백송 나무가 있어 그를 백송대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난세에 조국을 위해 큰 뜻을 품었던 젊은이들이 이 백송나무 아래에서 결의했다고 하니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지금은 근대적 정체(政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삼권분립의 한 축인 헌법재판소 앞뜰에 서 있다고 하니 그것도 참 의미심장합니다.      

  백송파로 불렸던 이들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명문대가 출신이었지만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김옥균은 장원급제를 해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귀재였으며 홍영식은 영의정 대감 집 자재였고 박영효는 임금의 사위였습니다. 지체 높은 집안의 자재들이었지만 신분을 초월하여 중인 출신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셨고 서구 문물을 직접 배우기 위해 멀고먼 유학길에 나서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자 조선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임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고 이를 좌시할 수 없어 역모로 몰려 도륙을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거사에 나섰던 것입니다. 


  갑신년(1884년) 조선의 현실이 어떠했기에 이 젊은이들을 이토록 절박하게 만들었을까요.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거듭나고 강화도에 군함을 보내어 조선의 개항을 압박합니다. 1875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개화정국이 형성되고 일본의 간섭이 날로 커지자 이에 반발하는 불만 세력도 점차 비등(沸騰)하게 됩니다. 급기야 개화 정책에 의해 홀대받던 구식군이 임오군란(1882년)을 일으켜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민씨 외척 집안을 공격합니다. 멸문의 화를 두려워한 민씨 집안은 청군에 빌붙게 되고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청나라에서 보낸 위안스카이(원세개)와 묄렌도르프가 조선 국정 모든 걸 좌지우지 했고 국왕은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개화파는 조선이 근대화되기 위해서는 청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일이 이렇게 되자 청국에 빌붙은 민씨 외척 세력을 타도의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고 같이 공부했던 민영익을 변절자로 성토합니다. 개화파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와 민영익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로 분열되고 맙니다. 조선이 청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집권당이 그기에 빌붙어 개화파를 압박해 들어오는 암담한 국면이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안남(베트남)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청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군사 상당수가 안남으로 이동하면서 일본은 조선 간섭의 국면 전환을 꾀하고 급진 개화파의 쿠데타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던 것입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던 갑신년(1884년) 12월 3일부터 사흘간의 긴박했던 현장을 들여다보려면  영화 [삼일천하]를 보면 됩니다. 일본군이 한양 성안에서 야간 포사격 훈련을 하는 등, 청을 압박하고 민영익은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청군 증파를 요청하게 됩니다. 김옥균은 고종을 알현하여 수구 사대당 축출과 개화 부국강병을 진언하고 고종은 김옥균에게 밀칙을 내려 신임을 표합니다. 김옥균은 일본 공사 ‘다케소에’와 조선 개혁에 대해 협의하나 그의 애매한 언행에 의구심을 가지지만 계획대로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거사일로 정하고 추진합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청군이 즉각 군대를 보내어 궁궐을 장악하고 일본군은 지원 약속을 어기니 거사는 3일천하로 무산되고 쿠데타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도피합니다.  


[도라지] 원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 김옥균 암살 장면


  일본으로 도피해 간 김옥균이 절해고도(絶海孤島)에 갇혀 지내는 등 갖은 고생을 하다가 결국 암살당하는, 갑신정변 이후를 그린 작품으로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추천합니다. 김옥균 암살 밀명을 받고 자객 홍종우가 일본으로 넘어가 김옥균에게 청나라 이홍장의 밀서를 전해주며 유혹합니다. 겉으로는 서구와 맞설 조,청,일 연대를 위해 청나라 최고 권력자 이홍장과 만날 것을 제안하지만 이는 김옥균을 속이려는 술책에 불과했는데 결국 김옥균은 홍종우에게 속아서 중국 상해로 건너가 암살당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갑신정변 이후 청나라에 기대어 권세를 유지하게 된 민비 외척 세력은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해 정변 십 년 만에 김옥균을 죽이게 됩니다. 김옥균이 죽은 그해가 “갑오세 가보세” 갑오년(1894년)이고 그 다음 해가 바로 민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 된, “을미적 을미적” 을미년(1895년)입니다.       

  갑신년의 거사는 흔히 변란(쿠데타)로 불립니다. 이 일을 일으킨 젊은이들이 반역자로 평가되고 있는 겁니다. 갑신년의 거사는 조선의 근대화와 역사의 발전에 기여한 점이 하나도 없을까요. 이들의 거사를 진압하고 외세에 빌붙어 권세를 누린 자들이 이 나라 주권을 지키는 데 기여한 게 있나요. 갑신정변의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이 일에 대한 평가가 그리 단순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젊음을 바친 젊은 그들의 충정에 감동하게 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는가, 고민하게 됩니다. 난제(難題)이긴 하지만 그만큼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 주제가 아닐까요. 요즘 젊은이들이 조국의 장래와 역사 발전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갖기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디쯤 와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있던 때로 조선은 위정척사 쇄국이 정책 기조였던 때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를 위해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면서 지방 유림의 반발에 부딪히고 결국 최익현의 상소로 1873년에 실각하고 맙니다. 그 다음 해에 일본 메이지 정부는 면서 조정은 김홍집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개화 정국을 도모합니다.      

우선 조정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쇄국에서 개화로 돌아서고 있다는 점이 이들 개화 사상가들이 큰 기대감을 갖도록 했습니다. 1873년 대원군이 물러나고 국정을 도맡게 된 고종은 명성황후 집안의 지원을 받으며 개화파의 형성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1882년  차별 받던 구식 군대가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그들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임오군란은 겉으로는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지만 이면에는 고종의 친정 이후로 세를 잃은 대원군과 정국을 쥐고 있던 명성황후 사이의 권력 다툼이 깔려 있습니다. 대원군을 지지하는 구식 군대가 별기군을 몰아내고 궁궐을 장악하자 대원군이 곧바로 국정을 장악해 들어간 걸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청의 개입으로 대원군은 볼모의 신세가 되어 버리고 다시 민씨 세력은 권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민씨 집안의 사람 중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은 백송파(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와 가깝게 지내고 서양을 두루 돌아본 사람으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젊은이들한테는 큰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에게 친청 기류가 강화되었다는 점입니다. 개화파들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으니 친청파는 이들이 달가울 리가 없습니다.       

홍영식 고종의 환궁을 만류하다가 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함, 김옥균 도일하여 지내다 10년 지나 암살됨, 박영효 친일로 악명이 높음.     

조국 개혁을 위한 뜻이 같았던 개화파가 분열된 이유가 무엇일까? 개화파와 척사파의 분열로 나라가 그토록 쪼그라들었는데 또 개화파 사이에서도 분열이 일어났으니 참담하다. 조선의 종자들은 구제불능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 사정을 낱낱이 들춰보면 나라고 그런 상황에 처하면 격분할 수밖에 없고 냉정을 잃을 것 같다. 임오군란 때 청군의 파병을 요청하여 대원군이 납치되고 조정에 고문관 뮐렌도르프와 위안스카이가 파견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청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20대 어린 위안스카이가 국정을 주물렀으니 신료들의 통분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된다. 이런 마당에서 젊은 개화파 인사들과 중년의 개화파 인사들의 분노 양상이 달라 내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민씨 척족 중심의 온건 개화파가 사사건건 딴지를 걸어 무슨 일도 진척이 안 되고 갈등은 점점 깊어만 갈 때 호기를 맞았다. 청불전쟁으로 청나라 군대 대부분이 베트남 전선으로 이동해 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본 또한 조선에서 청국을 능가하는 영향을 발휘하고 싶었으니 지원을 약속했을 것이다.      

우정국 정변 계획은 추진이 되고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으로 모셔 방어를 하지만 청군의 압박은 심해지고 청불전쟁이 매듭지어지면서 일본은 발을 빼게 된다.      

온건개화파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최익현, 이항로, 유인석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갖고 있던 지방 유림들의 반발이 일어납니다. 흥선대원군을 몰아내는데 일조한 이들이 다시 민씨 척족의 전제정치에 대해 반발하고 나선 것입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텐진조약으로 조선에서 철군을 하고 한반도는 태풍의 눈처럼 진공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세력 균형 틈바구니의 긴장상태일 뿐이었으니 그야말로 폭풍전야였습니다.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도 조선을 가운데 두고 세력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긴장 상태가 10년간 지속되면서 조선 내부는 개혁의 기운이 차차 성장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분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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