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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수 Feb 02. 2023

마음 기르기, 치유의 해법 감성교육


감성 교육이 중요하다 

감성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요즘 세상이 너무 삭막하고 인정이 메말라 사람한테서 훈훈한 온기를 느끼기 힘들게 되었다는 생각을 많이들 하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을 극심한 경쟁에 내몰고 물질이 만능이라고 부추기는 세상이니 누군들 그렇게 안 되고 베기겠습니까.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데 마음 여린 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른 뺨치게 잇속이 빠른 걸 보면 참 밉다가도 ‘저 아이들이 왜 다 저렇게 되었겠어’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과 눈빛을 나누고 볼을 부비고 할 일이 많지 않았던 아이들은 타인과 감정을 잘 나누지 못한다고 합니다. 부모들도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너무 바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젖먹이 때부터 남에게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니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고 내 감정도 잘 표현하지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요즘 감성교육 방법론이 참 다양하게 계발되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그게 다 공감하기 프로그램으로 보입니다. 공감(共感)한다는 것은 다른 이의 감정 상태와 비슷하게 느끼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원초적 감정은 생존 본능과 관련되어 따로 수련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통 그런 원초적 감정을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으로 나눕니다. 기쁨, 성냄,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을 말하는데 이게 다 개체(자신) 보존과 종족 보존(번식)의 원초적 욕구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감정은 공감되기보다 충돌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이런 감정이 절제되지 않으면 참다운 인간관계를 맺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성장한다는 것은 절제력을 키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원초적 감정과 달리 이기적 욕망과 무관한 감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정심’은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동물의 세계에서는 약자는 도태되고 승자만 살아남는 법인데 인간에게는 이 동점심이라는 특이한 감정이 있어 약자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고, 도태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감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고귀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감정이 고귀한 감정인지 아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자라면서 무수히 들어 왔던 말이거든요. 그런데 아는 만큼 잘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원초적 욕망을 절제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고귀한 감정 상태를 많이 접해 이런 감정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존경받았던 성현들이 공통되게 말하는 고귀한 감정은 동정심, 정의감, 양보심, 판단력, 신뢰감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감정은 분명 생존 본능, 이기심과는 대립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무리 읊조려도 이런 이타적인 감정이 저절로 깃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직접 보고 마음이 울컥하고, 불의를 보고 화를 내어 버릇해야 이런 고귀한 감정이 내면화된다고 봅니다. 쉽게 말해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지요. 직접 체험을 하는 게 제일 좋겠지만 간접 체험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울컥해서 눈물이 글썽해지는 감정 체험을 하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때때로 하게 되니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성과 감성, 의지를 조화롭게 잘 기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감성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우리 교육은 이 점을 좀 등한히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감성은 이성과 의지의 본바탕인데 말입니다. 이 시대의 삶이 너무나 각박하다 보니 우리 마음도 메말라졌습니다. 특히 아이들은 심리적 상처를 입기 쉬워 마음속에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이 느끼고 감수성을 풍부하게 하여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입니다. 성장기의 아픔을 형상화한 문학 작품은 간접 경험을 통해 감성 훈련을 할 수 있는 아주 유효한 수단입니다. 문학 작품을 감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고 그렇게 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 독자의 개인차에 따라 공감되는 정도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독자가 처한 상황에 알맞은 작품을 잘 고르는 것은 이 과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서 치료의 전문가들은 치료가 이루어지는 원리를 삼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독자는 작품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마음속에 억눌러 두었던 감정을 표출하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강박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해진 심리적 긴장을 완화시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문학 비평 용어로는 ‘카타르시스’라고 하는데 감정 배설(눈물)을 통한 정서의 순화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면 그 일을 빨리 잊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냥 잊혀지는 게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는 것일 뿐이고 언제든 유사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게 문제입니다. 꼬깃꼬깃 눌러 두었던 감정이 폭발적으로 표출되면 그게 바로 히스테리(화)라는 겁니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면(화를 내면) 그 자체가 또 심리적 상처가 되어 아픈 기억을 더욱 깊숙이 묻어두게 되니 치유가 더 어렵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치유가 되도록 하려면 부드럽게 차근차근 아픈 기억을 되살려 내고 그때의 심정을 표현하는 통찰의 과정을 밟아 가야 한다고 합니다. 영화 치료의 이론적 모태라고 할 수 있는 독서 치료 이론가 ‘메닝거’가 책을 통해 독자는 동일시, 정화, 통찰이라는 삼단계의 심리적 반응을 한다고 했는데,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에 공감하게 되고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이나 영화 속의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면 당연히 수용자와 등장인물이 닮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랍니다. 치료가 되려면 내면의 숨겨진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어야 하는데 등장인물이 겪는 아픔이 자신과 너무 일치하면 오히려 더 숨기려고 들고 이럴 때에는 오히려 마음의 문을 더 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치료가 더 어렵게 되고 말지요. 그래서 내용이 일치하는 작품을 골라서 되는 게 아니고 수용자가 겪고 있는 아픔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지만 같지는 않은 작품을 여러 적용 사례를 고려하여 골라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다양한 임상 경험을 서로 나눌 필요가 있고 이런 통합 과정을 통해 보다 면밀한 방법론을 찾아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여럿이 같이 작품을 감상하고 느낀 점을 서로 나누는 건 영화 독서 치료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보탬이 되기도 하지만 치료 효과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극중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치료의 과정이 끝나는 게 아니고 속에 억눌러 두었던 아픈 기억을 겉으로 드러내어 객관화하는 것으로 치료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의 생각과 내 생각, 느낌을 소통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도 공감을 통한 소통과 각성의 효과적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가 고뇌(angst)와 공감(empathy)을 이어주는 다리(bridge)가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발달단계에 따라 감성 눈높이를 맞추자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적절한 작품을 고르기 위해서는 심리 발달 단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발달 단계에 맞는 감성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매슬로우 이론과 사단칠정론을 결합하여 설명하는 것도 아주 쓸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보통 욕구가 충족되거나 결핍될 때 정서적 반응을 하게 되는데 그 정서적 반응이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분화됩니다. 어릴 때에는 생리,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기쁘고 결핍되면 짜증이 납니다. 이런 정서적 반응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리 아름다운 정서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거의 동물적 수준의 자극 반응 패턴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아기와 아동기에 이런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그 결핍된 욕구가 무의식을 형성하여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불안 심리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좀 심하면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어 강박증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합니다. 강박증이라는 건 쉽게 어떤 불안심리에 과도하게 얽매여 일상생활에 장애가 되는 정도라고 보면 되는데 마음속에 맺혀 있는 게 있어 화병이 생긴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마음속에 맺혀 있는 것을 풀어내어야만 강박증을 치유할 수 있는데 문학 감상은 아주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문학 작품이 그리고 있는 상황에 몰입하여 등장인물과 유사한 감정 상태가 되면서 억눌린 감정이 겉으로 표현되면 불안심리가 해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장기의 학생들은 관계 명예의 욕구와 결부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다룬 문학 작품을 많이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자기 부정과 이타심이라는 고차원적인 마음에서 생깁니다. 어릴 때에는 이기면 신나고 지면 화나는 단순한 정서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춘기 무렵이 되면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마음이 묘하게 반응하는 신비한 정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정서는 분명 한 차원 높은 마음 상태입니다. 보다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나 아닌 누군가 패배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정서 상태는 고귀한 마음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연민의 감정은 뻔뻔한 승리자에 대한 분노의 감정과 함께 합니다. 다시 말해 연민은 정의감과 직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감은 더 고차원적인 정서 상태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발달 심리학과 심성론의 도움을 받아 발달 단계에 따른 욕구와 그에 따른 감정을 살펴보고 이런 감정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을 선별하여 감상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생리욕구, 안전욕구, 관계욕구, 명예욕구, 자아실현욕구와 관련된 감정반응 패턴을 유형화하고 이 욕구들이 승화된 아름다운 감정에 공감하도록 하는 작품을 찾아 함께 읽는 것이 제안하는 감성훈련 과정의 기본 뼈대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절제, 공감, 동정심, 정의감, 염치, 자아실현의 감성 수준을 내면화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될 수 있습니다. 


예술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 

예술은 주관적 정서를 형상화 하는 것이라고 압축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서(情緖)란 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정서의 '緖'가 '실타래에 감겨 있는 실의 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글자입니다. '정서'는 마음의 실마리라는 뜻이지요. 마음 또는 감정이란 게 워낙 파악이 잘 안 되는 모호한 것이라 실이 마구 엉켜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느낌, 정서, 감정 이런 것들이 엄청 중요한데도 요즘 교육은 정서를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마음을 잘 살피고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를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문명사적으로는 근대 이후 과학적 사고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합리적 이성이 중요시 되어온 결과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입시제도가 이런 편향을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입시에서 감성교육에 대한 평가가 어려우니 학교에서 감성교육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게 되는 것이라고 보면 맞을 겁니다. 

요즘은 학생들이 입시 준비를 위해 어릴 때부터 논술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교육이 바람직한지 잘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랍시대 교육자들은 변증법을 30세 이전에 가르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고대의 교육관이 구시대적이라고 무시하는 게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청소년들이 온화한 심성을 기르기 전에 변론술을 먼저 배우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지적 명철함이 덕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논리가 변론술로 취급되어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게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기기보다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요.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이 이런 논리 만능 풍조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요. 

저는 감성교육을 위해 예술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개념을 활용하는 과학과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형상(이미지)을 활용하는 예술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예술은 잘 조화를 이루어야겠지만 지금은 죽어버린 예술 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과학과 구분되는 예술의 의미를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예술 활동의 목적은 정서의 표현 교감입니다. 그러니 정서는 예술의 처음이요 끝입니다. 예술 교육을 한다는 것이 예술 작품에 대한 비평적 판단력을 기르는 것이 되어선 안 됩니다.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를 떠올리고 이를 표현 매재(그림, 소리, 언어)로 형상화해내며 이렇게 표현된 이미지를 감상하고 공감하면서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예술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감성적인 이미지를 많이 접하는 게 우선입니다. 이런 간접 체험을 통해 공감대를 넓히고 자신의 정서를 표현하고 싶어 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비정상의 문학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 

문학은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언어의 산물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문학 작품은 감정 정서를 형상화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예술의 한 장르입니다. 문학 교육을 한다는 것은 곧 감성 교육을 한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문학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문학을 공감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분석의 대상으로 취급하니 문학을 어렵고 골치 아픈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문학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마음의 실마리 정서(情緖)와 연애(戀愛)는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지 않습니다. ‘연(戀)’ 글자에도 실(糸)이 들어있고 사랑이란 마음(心)을 말(言)로 엮는(糸) 것이 아닙니까. 문학은 감정을 형상적 언어에 실어 표현하는 예술의 한 갈래로서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요즘 학생들이 학교에서 문학을 개념으로 분석하는 공부는 문학을 배반하고 있는 꼴입니다. 예술 일반이 다 그러하듯이 문학은 감성을 이미지화한다는 데에 주목합시다. 

각각의 예술 장르는 표현수단(매재)에 의해 나뉩니다. 문학은 언어로 그린 심상(心像 ; 마음속으로 그린 그림), 음악은 청각 이미지, 미술은 시각 이미지, 무용은 몸짓 이미지를 표현 수단으로 합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많이들 얘기를 하는데 공통점(이미지, 형상)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안 하는 게 이상합니다. 사실은 표현수단의 차이보다는 각각의 감각 이미지가 전달하려고 하는 느낌(정서)이라는 공통분모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문학 교육이 이 문제를 소홀히 하여 아이들이 교육받을수록 문학을 싫어하게 된다고 봅니다. 뭐든 감동하지 않는 건 다 소용 없는 법이거든요. 감동(感動), 느껴서 마음이 꿈틀 하고 움직인다는 의미잖아요. '感'은 마음속에 느끼는 바가 있어 입을 벌리고 탄성을 낸다는 의미이지요. 어떻습니다. 뭐든 이래야 하지 않습니까. 마음이 꿈틀거려 절로 입이 벌어지고 탄성이 나오는 그런 일이 벌어져야 비로소 문학현상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문학은 예술의 하위 장르로서 예술이 갖고 있는 일반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일반적 속성이란 마음속에 일어나는 느낌(정서)를 이미지(형상)에 실어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예술은 정서의 형상화라고 말하면 간단하고 정확합니다. 예술을 과학과 대조하면 예술의 특성이 더 분명해집니다. 예술이 주관적 정서를 형상에 실어 표현한다면 과학은 객관적 사실을 개념으로 논증합니다. 문학 작품을 비평 대상으로 객관화하는 것은 문학을 개념화하는 것으로 공감을 위한 예술 활동의 본령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이제 우리의 문학 교육이 정상화되어야 합니다. 먼저 문학 작품이 형상화한 이미지에 주목할 것을 제안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카타르시스와 심리학자 칼 로스가 말한 감정이입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독자가 작품 속의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동일한 감정적 반응을 보이게 되고 감정 표출을 통해 카타르시스 즉 정서가 순화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심리적 상처가 치유되도록 하는 것이 문학 교육의 본래 목적임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조롱과 비아냥을 넘어 공감의 스토리텔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감상할 때 주로 일어나는 정서 반응이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고 비극은 그 기억을 되살려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겉으로 흘러나오게 하여 강박을 해소시킨다는 것입니다. 슬픈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눈물짓게 하고 눈물을 흘릴수록 사람이 착해지고 순해진다는 얘기에 참 공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희극 감상은 어떤 정서를 주로 불러일으킬까요. 비극이 주로 감정이입과 공감을 이끌어낸다면 희극은 감정 분리, 브레이트가 쓴 용어로는 ‘소격효과’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인물의 우스꽝스러운 짓을 비웃으면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심리적으로 분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희극은 대상을 풍자함으로써 비판적 의식을 갖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것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감정은 정의감과 직결되어 인간의 고결한 품성을 기르는 데에 꼭 필요한 정서라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세간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일베’의 조롱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미학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으며 우리에게 어떤 정서가 깃들게 할까요. 

풍자는 유머(humour = 익살, 해학)와 다릅니다. 유머는 보통 익살, 해학으로 번역되는데 익살은 웃기는 말과 행동을 의미하는 순우리말이고 해학은 같은 뜻을 갖고 있는 한자어입니다. 諧謔은 諧(어울릴 해)와 謔(희롱할 학)이 결합한 한자어로 ‘서로 어울려 희롱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諷刺(풍자)는 ‘날카롭게 찌르는 바른말’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풍자는 뼈가 있는 우스갯소리인데 비해 해학은 그냥 웃기는 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으로 인정할 만한 웃음은 어떤 것일까요. 우스갯소리 중에는 아름답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기도 하지요. 반면에 우스갯소리 중에서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것들도 있습니다. 아름다움 중 ‘골계미’라는 말 속에 그 답이 들어있다고 봅니다. ‘골계(滑稽)’의 골(滑)에 뼈(骨)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뼈 있는 말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의 요체는 풍자 속에 들어있는 긴장입니다. 모든 아름다움(美)은 긴장과 균형 조화를 본질로 하는데 풍자에는 바로 이런 속성이 내포되어 있거든요. 웃음은 본질적으로 긴장을 해소해 버리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머 해학은 이완과 나태를 본질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웃음은 삶의 고달픔을 덜기 위한 좋은 휴식의 기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모순을 감추고 도전적 비판의식을 해체시키기 위한 유력한 지배 도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생각 없는 유머는 비인간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해 봅시다. 약자를 희롱하는 웃음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웃음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비웃음의 대상이 권력이어야 합니다. 비웃는 행위가 자칫 잘못하면 권력에 의해 탄압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일 때 긴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뛰어난 희극은 대부분 풍자의 칼날이 권력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이 추하듯이 약자 앞에서 으스대는 것은 추합니다. 그 반대로 약자에게는 연민으로 강자에게는 비판과 풍자로 대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 비장한 각오로 헌신하는 것도 아름답지만(悲壯美) 부당한 권력을 비꼬는 것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골계미라고 합니다. 우리 삶이 너무 힘겨워 가끔 한바탕 웃고 모든 고달픈 것들을 잠시 잊고 싶은 마음은 그리 탓할 게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은 그렇게 잊어질 수도 없을뿐더러 웃어넘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누군가 부당하게 짓밟히고 있는 이가 있으며 그의 희생으로 우리의 안락이 보장되는 것이란 걸 잊으면 안 됩니다. 그걸 모르거나 모른 척하는 것은 더러운 짓입니다. 그러니 웃음은 경계해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들의 웃음 대부분이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성의 시대가 가고 감성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합니다. 지난 세기에 과학 개념과 이론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데 기여하며 물질문명의 성장 발전을 견인해 왔다면 이제 우리 사회는 자연친화적이고 지속가능하며 호혜적인 공존의 새 시대를 일구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이제 차별을 넘어 공존의 문화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루는 요소들 중에 감성과 소통은 기본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마음과 마음이 잘 통하게 할 수 있을지 연구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이들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질주의가 정서적 교감을 가로막아 현대인을 점점 더 외롭게 만들며 감수성이 무디어져 행복감을 느낄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보는 문명 진단에 대체로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그 기술을 누가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따라 양화(良貨)로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영상 기술의 발전이 감정 교류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이나, 쌍방향 다중 네트워크가 일방적인 브로드케스팅(방송)의 군중 소외를 극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감성을 나누느냐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르네 지라르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가질 때 중개자의 이야기에 많이 의존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욕망의 삼각형’ 이론이라고 하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이야기가 우리를 대상과 직접 만날 수 없게 만들며 일종의 선입견을 심어줘서 대상을 왜곡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상품 광고에 스토리텔링의 기법이 사용되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특정 상품에 대해 기획된 정서적 반응을 보이도록 길들여진다고 합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영상 매체와 실시간 네트워킹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신세대는 이 새로운 매체에 깊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이전 세대와의 정서적 공감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봅니다. 스토리텔링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려는 자들은 이야기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 다양한 네트워크를 활용합니다. 새로운 네트워크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소셜네트워크는 이전 네트워크에 비해 개인이 일방적 수용자에 머물지 않고 정보 생산자 배포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획기적인 기술이긴 하지만 이 네트워크 또한 물신주의 이미지에 의해 많이 점령당한 형국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네트워크에 대한 관심이 많이 필요합니다. 날로 진화하는 네트워킹 기술에 접목시킬 수 있는 공감 스토리텔링 방법론을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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