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심 속 비밀 정원, 창덕궁 후원을 거닐다.
서울의 한복판 북촌과 종로의 골목길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도심 속에 고요한 풍경이 펼쳐지는 장소가 있다. 창덕궁 뒤편 깊게 감추어진 이 정원은 조선 시대 왕과 왕비, 왕족들이 자연을 즐기던 비밀 정원으로, ‘비원’(秘苑)’이라고 불린다. 이름만큼이나 신비롭고 고즈넉한 매력을 지닌 공간인 창덕궁 후원은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한 한국 전통 정원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어릴 때 가보았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시 가봐야지 생각만 하면서도 막상 비원에 가는 일은 계속 미루어졌다. 그런데 비원에 가겠다고 시도를 하면서 큰 난관에 부딪쳤다. 사전 예약이나 현장 예매를 해야 하는데, 현장 예매는 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니 어렵고 인터넷 예매 또한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예매창을 열고 클릭하려고 하는 순간 모든 시간대 방문 예매가 매진되는 경험을 수차례 한 끝에 겨우 어렵사리 예매를 하고 비원에 가게 되었다.
일찍 준비를 하고 창덕궁을 먼저 관람하고 비원에 입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오랜만에 방문한 창덕궁에는 외국인들이 가득했다. 얼핏 느끼기에 한국인보다 외국인 비율이 높은 것 같았고, 재미있는 것은 외국인들 상당수가 한복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렌털샵에서 빌린 옷을 입고 외국인은 이미 조선의 왕과 왕비, 공주마마가 되어 있었다. 창덕궁은 그 자체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인위적인 축선이나 대칭보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존중한 설계로 유명한 궁궐로 평가받는다.
비원 입장 시간을 기다리며 창덕궁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아름다운 정원과 궁궐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드디어 비원 입장 시간이 되었고, 정원 해설사의 설명을 귀동냥하면서 비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살짝 굽이진 산책로를 넘어 첫 번째 만나게 되는 곳이 비원의 가장 대표적인 장소인 부용지와 주합루이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부용지 위에는 작은 섬이 있고, 그위엔 애련정이라는 정자가 고요히 서 있다.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정자와 누각들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의 휴식과 독서, 교양 활동을 위한 기능적 공간이었다고 한다.
주합루는 부용지 북쪽에 자리한 2층 누각인데, 1층은 서고로, 2층은 경치를 감상하고 시회를 열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멋진 서고라니! 주합루에서 내려다보는 부용지의 풍경은 창덕궁 후원의 백미로 꼽힌다고 하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주합루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고 밑에서 올려다보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해서 아쉬운 느낌이었다. 연못을 중심으로 주합루와 애련정의 멋진 소나무와 물 위에 반사된 하늘과 정자의 모습은 수묵화 한 폭을 떠오르게 한다. 이곳에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며 연못과 정원을 느꼈을 조선시대 왕과 문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한 풍경이었다. 주합루와 부용지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비원의 핵심 장소이다.
조금 더 깊숙하게 걸어 들어가면 ‘애련지’와 ‘존덕정’을 만나게 된다. 애련지는 ‘연(蓮)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은 연못으로, 1692년 숙종이 “더러운 물이라도 맑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은 군자의 덕을 상징한다”며 직접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존덕정(尊德亭)은 ‘덕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육각형 구조와 두 겹의 지붕, 정교한 단청으로 조선 중기 건축미를 대표한다고 한다. 부용지와 주합루를 감싸고 있는 정원이 차분하지만 아름다운 꽃과 단풍으로 화려함을 느끼게 해 준다면, 애련지 부근은 훨씬 고즈넉한 느낌이다. 방문한 시기가 아직 연꽃이 본격적으로 피는 6월이 아니라 연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차분함과 도도한 아름다움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이곳 장소와 건축물의 이름은 그 자체로 조선 시대의 철학과 선비정신을 느끼게 해 준다.
계속 더 들어가면 불로문과 옥류천 일대로 연결되는데, 옥류천 쪽에는 공사가 있다고 해서 가보지 못했다. 창덕궁 후원인 ‘비원’은 약 32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넓은 공간이지만 방문객이 돌아다니는 공간은 제한적이고, 실제로 짧은 시간에 다 돌아보기는 어렵다. 불로문은 활쏘기와 사색, 자연 관찰이 이루어지던 조용한 곳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이름을 지녔다. 이제 조선 문인의 철학과 정신에서 신선계의 편안한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비원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화려한 꽃의 정원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나무와 풀 사이를 거닐다 보면 저절로 사색하게 되는 쉼과 여유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자연을 느끼며 조선의 정치와 철학을 논했던 왕가의 사람들과 문인들의 정신이 가득 담긴 비원을 천천히 걸으며 왜 비원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비원 관람은 1시간 단위로 입장하게 되어 있지만 일단 입장한 후에 나가는 시간은 자유로우니 얼마든지 천천히 거닐다, 쉬다 사색해도 된다. 비원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나오면 바로 창경궁으로 갈 수도 있다. 내 오랜 기억에는 ‘창경원’이었던 곳이다. 동물원과 식물원이 있던 그곳은 어렸을 때 도시락 싸서 놀러 가는 곳이었고, 대학 시절에는 밤 벚꽃 놀이를 하거나 당시 대학생들 은어로 ‘야사쿠라팅’이라는 미팅을 하던 장소이기도 하였다. 현장에서 짝을 지어 밤 벚꽃 아래를 거닐고 이야기하는 미팅인데, 조금 촌스럽지만 정겨운 미팅이었다. 내게도 그런 기억 한 자락이 남아 있다. 이 창경궁이 동물원이었던 기억도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궁궐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린 슬픈 역사도 모른 채 그저 놀이공원 가듯 했던 것이 새삼 부끄럽기도 하다.
1983년 이후 복원작업을 거쳐 이제는 궁궐의 본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는데, 오랜만에 찾아간 창경궁은 울창한 나무와 연못으로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희귀한 나무들과 꽃도 많아 한층 정원의 분위기가 살아 있고 전체적으로 한적해서 도심 한가운데서 여유롭게 산책하기 너무 좋은 장소였다. 창덕궁에서 시작해서 창덕궁 후원인 ‘비원’ 그리고 창경궁까지 돌아보다 보니 걸음마다 우리의 정신과 역사가 느껴지고 내 마음과 정신은 편안한 여유로움과 은근한 자부심이 차오르는 하루를 지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