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을 보고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보았다. 주위에서 여러 통로로 좋은 영화라고 추천을 해줘서 한 번 보려고 했는데 극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영화마니아도 아닌 나는 정말 드문 드문 극장을 가는 편이다. 내가 사는 곳에 상영관이 없어 춘천까지 가서 봤는데, 상영관에는 20대 여성 두 명과 60대 부부인 우리 두 명, 네 명이 전부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약간 머쓱한 기분이었지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곧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명랑하고 밝고 세밀한데, 주제를 밀고 가는 힘은 묵직하고 힘차고 용감하다. 그리고 끝난 뒤 지금까지 느껴지는 감동의 여운은 여전하다. 스포 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으로 여기까지만 쓰려고 한다.
최근에 주목할 만한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이 많아지는 것 같아서 반가운 마음이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영화진흥위원회의 ‘2024년 한국영화 성인지 결산’에 의하면 2024년 한국영화 실질 개봉작 182편을 분석한 결과, 여성 핵심창작인력의 비율은 감독 24.0%, 제작자 25.6%, 프로듀서 35.0%, 주연 48.1%, 각본 34.7% 촬영감독 8.9%로 집계됐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여성창작자와 여성 감독의 활약이 활발해지고 있다는 평가인데, 내 생각에는 아직 이런 정도이구나 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영화의 시작부터 여성은 함께 활동했지만 영화계에서 여성 감독의 활약과 성과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영화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라는 50초 분량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짧은 영상이었지만 19세기 엄청난 충격을 준 영화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더 주목하는 사건은 바로 1년 뒤 알리스 기-블라쉐 (Alice Guy-Blaché)라는 여성 영화감독의 등장이다. 1896년 알리스 기-블라쉐 감독은 <양배추 요정>이라는 영화를 내놓았는데 이 역시 짧은 영상이지만 최초의 이야기 구조를 가진 극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를 주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양배추밭에서 주워 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상을 보면 양배추밭에서 한 여성이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움직이다가 아이를 찾아 보여주는 영상이다. 열차의 도착이 장면을 단순하게 보여주는 것에 머무른다면 이 영화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한 발 나간 영화였다. 이후에도 계속 영화 작업에 참여하며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1906년에 만든 <페미니즘의 결과들>(원제: Les Résultats du féminisme, 1906년)이라는 영상을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바뀐 상황을 패러디하고 있는데 그 결과가 페미니즘인지 안티 페미니즘인지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상황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날카롭고 선구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다. 그렇지만 이 여성 영화감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렇게 영화사 초기부터 여성 감독이 영화를 이끌었지만 현재까지의 영화사에서 여성 감독의 자리는 여전히 취약하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식민지 시대 1923년 <월하의 맹세>의 윤백남, 1926년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이 영화의 포문을 열었지만, 여성 영화감독은 해방 이후 등장한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 영화감독은 <미망인>(1955년)을 연출한 박남옥으로 알려져 있다. 박남옥 감독은 사실 영화사에서 잊힌 인물이었는데 199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미망인>이 재상영되면서 조명되기 시작했고, 이제 우리나라의 ‘최초 여성 영화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다. 박남옥은 원래 신문기자였으나 해방 이후 영화 촬영소에서 편집 조수, 스크립터 등 다양한 보조 역할을 한 영화인이었다. 그러다 전쟁 직후 전쟁미망인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미망인>이었다. 자금도 상황도 열악한 상황에서 언니에게 돈을 빌려 영화 제작에 나섰다고 하는데 그래서 <미망인>의 제작사 명이 ‘자매영화사’라는 점도 흥미롭다. 영화 연출 때 아이를 등에 업고 연출을 한 일화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같은 열정에도 불구하고 <미망인>은 흥행에 성공하지는 못했고 이후 감독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영화를 제작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영화잡지 출판 등으로 지속적으로 영화와의 인연을 이어갔다고 한다.
새삼스럽게 영화사 초기 여성 감독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선구적이면서도 열정적이었던 여성 감독들이 왜 자신의 커리어를 계속 이어가기 힘들었을까라는 오래된 질문의 반복이다. 굳이 되새기지 않아도 그 이유는 대략 유추해 볼 수 있다. 여성 감독에 대한 투자와 지원의 제한, 무시와 배제라는 사회 문화적 환경의 장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생각한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역주행이 일어나면서 관람객 15만을 향해가고 있다는데 아직 부족하다. 우선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이런 뛰어난 감독의 시선과 목소리에 더 많은 지원과 투자가 이어졌으면 한다. 우리의 인식과 공감의 지평을 확장해 주는 윤가은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면서 더 많은 여성 감독의 활약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