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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Nov 11. 2022

2022.10.30.


  날이 맑다. 하늘은 날이 지날수록 높아지고, 낙엽은 그 색을 더해간다. 


  오늘은 저학년, 고학년 수업이 번갈아가며 있는 날이다. 저학년 아이들과 고학년 아이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사랑스러우면서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교사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 저학년 아이들은 순수한 아이의 귀염성을 간직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들의 세계에서 내보내는 작고 순수한 질문들은 한껏 때가 묻은 교사의 마음을 한껏 즐겁게 한다. 아이들은 작디 작은, 형형 색색의 아름다운 생각의 조약돌을 밖으로 내던진다. 조약돌을 받을 준비가 되었거나, 조약돌 모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혹은 그런 때에는) 조약돌은 무엇보다 아름답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조약돌은 그저 나를 힘들고, 아프게 만드는 작은 방해꾼일 뿐이다.


  고학년 아이들은 마음이 훌쩍 커있다. 마치 작은 병아리가, 작은 강아지가 몇 개월이 지나면 겉모습은 훌쩍 어른이 되어있듯, 아이들도 비슷하다. 키는 훌쩍 자라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그러나 큰 강아지가 개는 아니듯, 큰 병아리가 닭은 아니듯, 속은 아직 덜 영글어있다. 작은 아이들이 외양만 자란 탓이다. 순수함과 그에서 비롯된 무지함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아이들과 대화하거나 지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자아가 생기면 다른 이의 충고를 듣지 않고 싶은 탓이다. (나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그런 모습은 교사로서 꼭 필요한 모습이다. 아이들은 나를 혹독히 단련한다. 내 마음을 시도 때도 없이 시험한다. 내가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는지. 내가 정말 아이들을 존중하는지. 내가 정말 아이들을 한 명의 인격체로 인정하는지. 아이들은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나를 시험한다. 시험의 과정이 아무리 괴로워도, 견뎌내고 성장해야 함을 알고있다. 그것이 교사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깊게 바라보면 아이들을 사랑할 구실이 생긴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진 사랑 때문일까? 어떤 사람은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다보니 아이들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나에게 없는 순수함이 있다. 순수함 속에는 내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맑은 마음이 있다. 아이들의 맑은 마음을 닮고 싶어서, 아이들을 존경하고, 아이들을 본받고 싶다.


  오늘은 O군과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O군은 다른 학생을 때리고, 괴롭히는 아이다. 어디에나 있는 '불량 학생' 이지만, 어딘가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다. 다른 학생들을, 다른 사람들을 힘껏 밀어내려 하면서도 밖으로 한껏 손을 내밀고 있다. 그 손을 누군가 잡아주길 바라며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잡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행위이다. 적은 노력으로도 할 수 있는 행동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공감해야 한다. 진심으로 학생에게 신경을 쓰고, 학생을 걱정해야 한다. 학생을 가르치려 들어서도 안되고, 학생을 이끌기 위해 애써도 안된다. 누구나 자신을 급하게 당기는 사람에게는 딸려가지 않는 탓이다. 스스로 걸어올 수 있도록,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안아주어야 한다.


  오늘 O군이 나의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다. 체육 수업 시간에 다른 학생에게 날 선 말을 하던 O군을, 크게 지적하지 않고 달래며 넘어간 나에게 주는 보답일까? 수업이 끝나자 나에게 다 녹은 초콜릿 하나를 건낸다. 초콜릿은 다 녹아있었다. 더운 날씨 탓이다. 나에게 초콜릿을 건내며 한마디 보탠다. '다 녹았어요.'


  괜찮아. 너무 고맙다.


  나는 마음으로 울었다. 아이의 순수함에, 아이의 따뜻함에 울었다. 아이에게는 어떤 초콜릿이었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서 받은 물건인지도, 자신이 산 것인지도. 어떤 초콜릿인지는 관계없다. 나는 그 물건이 초콜릿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다 녹은 초콜릿을 건냈다. 더워서 다 녹은 초콜릿을. 그러나 아이가 건낸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나는 아이를 한 번 꽉 안아줬다.


  정말 고맙다.


  아이는 쑥쓰러워하며 얼른 들어가버렸다. 나는 이 아이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이였지만, 나와는 남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 아이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지난 주말, 슬픈 소식을 들었다. 할로윈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인파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150여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는다는 것이 정말 슬픈 와중에, 현실감이 없는 소식이었다. 시간이 점차 지나며, 죽은 사람의 숫자가 점점 현실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 소식만큼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이 시각에도 죽은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음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쉽게 미워한다. 사람을 깊이 바라보지 않는 탓이다. 사람을 깊게 바라본다면, 사람은 미워하기 힘든 존재이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그에 맞는 사연이 있다. 누구나 사연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편한 것을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굉장히 힘든 노동이다. 그런 노동을 하는 것 보다, 그저 욕 한마디 툭 던지고 넘어가는 것이 훨씬 편하다.


  죽은 사람은 잘못이 없다. 아무리 술을 먹기 위해, 이성을 만나기 위해, 유흥을 위해 모였다고 한들, 그들은 죄가 없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이외에, 인간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우리가 힘을 모아 세운 이 공동체여야 한다. 인간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의 제 1 목적은 국가에 속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지난 주말, 우리 나라는 그 목적에 실패했다.


  어떤 사람은 막을 수 없는 재난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에 막을 수 없는 재난은 없다. 막을 수 없는 재난이 있어서도 안된다. 막을 수 없는 재난이라고 포기하는 순간, 국가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막을 수 없는 재난이 아니라, 이제야 막을 방법을 생각하게 된 재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다. 안전 수칙은 피로 쓰여지는 탓이다.


(어떤 정권이나, 특정 정치인의 탓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그동안 공직을 행했던 모든 공직자의 손에 잘못이 있다. 사건이 지금 일어났을 뿐, 5년 뒤 , 10년 뒤에 일어났다고 해서 -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 - 지금보다 더 잘 대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중밀집사고의 역사는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대처 매뉴얼을 만들 기회와 시간은 언제든 있었다.)


  우리가 할 것은 이제라도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다. 그 이전에, 다치고 죽은 사람들, 그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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