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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Nov 30. 2022

나의 엄마

엄마는 생명의 상태에서 양자 상태로 돌아가셨다.

  간밤에 비가 그쳤다. 날씨가 추워져 겨울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한다.

  벌써 1년의 마지막 달이 다가온다. 한 해를 돌아보기는 아직 이르지만, 몇몇 상점에 차려진 이른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나도 돌아볼까 한다. 올해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중간중간에 있던 소소한 일을 제외하더라도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을 돌아보려 한다.

  올해 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시험에 합격한 뒤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많이 아팠다. 내가 어린 시절 당하셨던 교통사고 덕에 1급 지체장애를 달고 사셨다. 휠체어를 이용하셨고, 가슴 아래로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팔도 오른팔만 겨우 움직이실 뿐이었다. 그래도 젊을 때는 늘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고는 하셨다. 그렇게 아프고 힘든데도, 나에게는 늘 웃는 얼굴을 보여주셨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미안해하셨다. 엄마 노릇을 못한다고 했다. 엄마가 해주는 밥도 못 먹어봤다고 늘 미안해하셨다.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시며 말했다. 그러면 나는 늘 이야기했다. 무슨 소리냐고.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어릴 때는 어머니가 조금 신경 쓰였다. 어머니는 남들과 달랐으니까. 밖에 나가면 누군가 놀릴까, 누군가 부끄럽게 할까 언제나 조마조마했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 부끄러움이 동시에 떠오르는 와중에도, 나는 티 내지 않았지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그런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늘 착했다.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대해주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금세 깨달았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에 평생 몸부림쳤다. (이 이야기를 쓰는 지금도 죄책감이 가슴을 찌른다.)

  어머니는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밖에 나가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곤 하셨다. 별다른 풍경은 없다. 늘 내가 다니는 길, 늘 다니던 동네. 그렇지만 어머니한테는 늘 새로웠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가는 산책이 어머니에게는 늘 즐거웠을 것이다. 바깥공기를 맡는다는 자체가 행복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마음껏 행복해하셨고,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즐거웠다. 주말이면 되도록 어머니와 함께 동네 산책을 다녔다.

  나는 대학을 가며 집과 조금 멀어졌다. 마음이 멀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멀어지게 된 탓이다. 대학은 집과 멀었고, 멀다는 핑계로 집에 자주 가지 않았다. 몸이 피곤한 것이 싫었고, 늘 우리 가족이 영원할 것 같았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놀고 싶었다. 나는 집에 자주 가지 않았고, 어느새 군대를 가게 되었다. 전역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집에 잘 가지 않았다. 어느덧 졸업하게 되었고, 나는 의정부에서 기간제로 일을 하게 되었다. 벌써 집에서 나온 지 6년, 7년.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집은 너무 멀었고, 나는 이기적이었다.

  그러다 또 시험에 떨어진 나는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그리고 1년,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산책도 다니고, 함께 밥도 먹었다. 어머니는 늘 참았다. 아파도 참았고, 필요한 것이 있어도 참았다. 등이 간지러워도, 목이 말라도 참았다. 혹시 나를 부르면 내가 불편할까 늘 참았다. 밖에 나가고 싶어도 참았고,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았다. 어머니는 늘 다른 사람을 생각했다. 늘 미안하다고 했다. 물을 가져다줘도 미안하다, 고맙다. 약을 가져다줘도. 일으켜 세워주거나, 산책을 가도. 늘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했을 것이다. 남에게 피해 주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늘 부탁을 했으니.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나는 튼튼하고 강해져 가고 엄마는 점점 가벼워졌으니까.

  나는 다시 하남으로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정말 아쉬워했다. 나도 정말 아쉬웠지만, 마음을 애써 숨겼다. 어차피 사람은 독립해서 한 명의 성인으로 살아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떠났다. 떠난 곳은 바쁘고, 힘들었다. 나는 늘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시험공부도 해야 했고, 일도 해야 했다. 마음이 맞지 않는 동료들과 문제도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신경 쓸 여유가 많이 없었다. 한 번씩 연락을 주고받곤 했지만 점점 대화할 시간이 없어졌다. 나는 집에 전화하지 않았다. 전화하지 않아도 괜찮았으니까, 뭐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삶이 바쁘고 힘들어 잊고 살았다.

  그러다 드디어 시험에 합격하고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한다. 호흡기가 약해 숨을 잘 쉬지 못하는 탓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처음 사고가 났을 때부터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이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들은 아직까지 건강하신 게 기적이라고들 했다. 보통 몇 년 안에 돌아가신다고 했다. 엄마는 사고를 당하고도 20년이 넘게 버티셨다. 숨을 힘겹게 쉬며 버티셨다. 그러나 점점 근육은 지치기 마련이다. 폐렴을 앓게 되는 횟수는 늘어났고, 병원에 입원하는 날짜도 늘어났다. 지난번 폐렴으로 병원에 다녀온 이후로 엄마는 쇠약해졌다.

  코로나가 찾아왔다. 가장 먼저 걸린 것은 나였다. 나는 다행히 집에서 걸리지 않아 집에 옮기지 않았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집에도 코로나가 돌았다. 아빠가 걸리고, 누나가 걸렸다. 어머니가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머니는 곧 코로나에 걸렸다. 병원에 급히 달려갔고, 음압병실에서 밤을 새웠다.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지고, 숨은 가빠졌다. 나는 불안했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어머니는 가쁜 숨을 쉬면서도 나에게 자라고 했다. 불안해서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 의자에서 조금이라도 자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지켜봤다. 산소포화도는 계속 떨어졌다. 병원에서 이제 병실이 났다고 했다. 나에게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얼른 가서 필요한 물건 가져올게, 얼른 다녀올게.

  그게 마지막이었다. 얼른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격리 병동이라 보호자가 오실 수 없으니 물건만 보내달라고. 나는 물건을 보냈다. 그리고 안심했다. 체계적으로 진료하니 어머니가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그다음 날 전화가 왔다. 호흡이 너무 힘들어 목에 구멍을 뚫어야 하는데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나는 어머니에게 선택을 미뤘다. 지난번 호흡기 구멍을 뚫고 어머니는 자리에서 아예 일어나지 못하셨다. 병원에서 퇴원하지도 못하시고, 시간은 점점 지체되었다. 나는 그 고통을 알기에, 또 어머니가 여느 때처럼 일어나실 것 같았기에 구멍을 뚫어달라고 말씀드리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뚫지 않기로 하셨다. 그리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과연 스스로의 선택으로 구멍을 뚫지 않으신 걸까? 지난번 병원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가족들이 눈앞에 떠오른 것이었을까. 늘 남을 먼저 생각하던 어머니가 이번에도 우리를 먼저 생각하신 걸까. 내가 힘들까 봐, 우리가 힘들까 봐 호흡기 구멍을 뚫지 말자고 하셨을까. 나는 아직 괴롭다. 어머니가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두렵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나를 먼저 생각하셨을까 두렵다.

  두려운 마음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두어 달은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최면을 걸듯, 아무리 어머니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남을 생각하실 리는 없다고 되뇌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먼저 생각하셨을 것이다. 본인이 불편해서 구멍을 뚫지 않으셨을 것이다. 나를 먼저 생각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는 호흡도 못하고 의식도 없으셨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는 처음 봤다. 늘 웃던 눈은 흰자가 보였다. 입은 반쯤 벌어져 침이 새어 나온다. 반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호흡기 선이 꽂혀있었다. 기계로 강제로 호흡하는 중이라고 했다. 더 이상의 연명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연명치료 동의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본인이 서명했기에, 연명치료를 진행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울었다. 어머니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늘 내 앞에서 울던 어머니가, 오늘은 울지 않았다. 늘 씩씩하게 말하던 나는 울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던 나는 울었다. 이제 어머니는 돌아오지 못한다. 어머니는 이제 돌아가신다.

  의사 선생님에게 외쳤다. 치료를 진행해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난색을 표하셨다. 아무리 외쳐도 안된다고 하셨다. 이미 본인의 동의가 있기에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기에, 본인이 고통받는 것을 멈춰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연명치료를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장례도 치르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나에게는 어머니와 이별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 화장터에서도 죄인처럼 가장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다. 어머니는 그렇게 급하게 갔다. 누가 떠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급히 떠났다. 늘 버릇처럼 외치던 천국으로 떠났다. 나는 화장한 어머니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다음날, 묘지로 가서 어머니를 땅에 묻었다. 어머니는 조금 남았다. 다 타고, 하얀 가루만 조금 남았다. 미소도, 따뜻한 마음도, 늘 미안하다 말하던 말도 떠났다. 하얀 가루 조금을 남기고.

  나는 어머니가 그립다.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한스럽다. 인간은 누구나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떠나는 것인데, 늘 알고 있는 상식인데, 아직은 떠나보내기가 버겁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는 작디작았다. 어머니는 늘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늘 내가 필요했다. 밥을 먹어도, 책을 읽어도 내가 필요했다. 어머니는 늘 내가 있어야 했고, 늘 나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이제 깨달았다. 진짜 어머니가 필요했던 것은 나였다. 어머니는 늘 미안해했지만 늘 내 곁에 있었다. 내 걱정에 밤새우고, 내 걱정에 기도했다.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에게 늘 기도했다. 나는 어머니 덕에 자랐다. 어머니 덕에 잘 살았다. 어머니에 붙어 빨아먹으며 컸다.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늘 기억한다. 어머니와 있었던 일을, 어머니가 좋아했던 음식을. 늘 기억하고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이미 없지만 내 기억에는 늘 같이 있으니까. 나는 어머니를 늘 기억할 것이다. 늘 나만 바라보던 어머니를, 나만 걱정하던 어머니를. 혹시 죽은 뒤에,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후세계가 있다면 꼭 만나서 웃어주고 싶다. 엄마가 걱정 안 해도 잘 산다고, 그러니까 걱정 좀 그만하지 그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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