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보선생님 Dec 01. 2022

마음이 답답한 날

오늘은 작은 실패와 좌절을 느꼈다.

  겨울 하늘이 높고 파랗다. 공기는 차가워져, 숨을 쉴 때 코와 폐가 매우 시리다.

  아이들을 혼냈다. 아이들은 오늘따라 거칠었고, 나에게 대드는 아이도 있었다. 수업을 하며 가장 처음으로 부딪치는 난관은 두말할 것 없이 아이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피하지 않는 것이다. 피하지 않고 아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본다. 아이가 먼저 눈을 피할 때까지, 아이가 교사의 힘에 짓눌릴 때까지. 아이를 똑바로 바라본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아이들도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동정을 살핀다. 아주 면밀히 살펴 자신의 태도를 정한다. 때로 아이들의 눈치는 매우 빨라서, 내가 나 자신을 다 보여주기도 전에 나를 다 파악하곤 한다. 나의 말이나 행동, 표정, 걸음걸이 하나하나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재빨리 파악한다. 그리곤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결정한다. 보통은 아이들의 판단이 옳다. 나는 아이들에게 몇 가지 단서를 준다. 아이가 장난을 칠 때, 장난이 과해지면 주의를 준다. 아이가 수업 진행 방식에 대해 의문을 표하면 주의를 준다. 내 앞에서 다른 아이와 싸우거나, 예의가 없다면 주의를 준다. 처음에는 가볍게 주의를 주지만 반복되면 내 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은 선이 일단 그어지면, 선을 잘 넘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다르다. 이 아이들은 여러 이유로 내가 그어둔 선을 넘곤 한다. 내가 만나본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미숙해서 그런 경우가 많았다. 화가 났을 때, 짜증이 났을 때 감정을 스스로 소화하는 방법을 몰랐다. 화가 나면 나는 대로, 짜증이 나면 나는 대로 감정을 터뜨리곤 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는 때때로 큰소리를 치곤 했다. 아이를 일단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아이는 작은 목소리에는 진정하지 않는다. 나는 아이 한 명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아이들은 많고, 다들 내 시선을 기다린다.

  오늘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이들은 쉽게 짜증을 냈고, 화를 냈다. 체육시간은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하기에 나는 못 들은 척 넘겼다. 그러나 아이들은 내가 못 들은 척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도는 점점 심해지고, 더 이상 좌시하기 어려운 만큼 짜증이 쌓였다. 나는 한숨을 쉰다. 왜 이 아이들은 재미있는 시간을 재미있게 즐기지 못할까. 왜 꼭 이겨야 하고, 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체육시간은 즐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자신과의 경쟁을 하든, 물리 법칙과 경쟁을 하든, 다른 친구나 다른 팀과 경쟁을 하든, 인간은 늘 지곤 한다. 지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인가? 아이들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연습을 한 적도 없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운동도 전부 잘해야 직성이 풀린다니,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깨닫는 것이 있다. 고통스러운 진실, 예를 들면 '나는 모든 것을 잘할 수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길 수 없다. 내가 내 생각보다 못할 수도 있다.' 같은 것. 그러나 아이들은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내가 보던 유튜브 채널에서 국가대표 유도선수였던 조준호 선수가 한 말이 있다. '승리를 하면 승리를 얻지만, 패배를 하면 승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얻는다.' 아이들은 패배해본 적도, 실패해본 적도 많이 없다. 아이들은 많이 깨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런 짜증을 나에게 내뱉는다. 내가 규칙을 잘못 적용해서, 게임을 잘못 짜서, 팀원이 못해서 자신이 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못해서 진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못해도 괜찮다는 것을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잘한 아이에게 박수를 쳐 주지도, 상을 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작은 칭찬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참여한 모두에게 박수를 쳐줄 뿐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늘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은 멀다. 아이들의 마음은 승리를 향해있다. 언제쯤 아이들이 져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일까.

  며칠 전 월드컵 경기가 있던 다음날, 한 아이가 나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 축구 보셨어요?

  그럼 봤지.

  화나지 않으셨어요? 심판 완전 짜증 나요.

  왜? 난 재밌고 좋았는데.

  진심이었다. 축구는 정말 재밌었다. 물론 이겼으면 더 좋았겠지만, 졌어도 재밌었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서 뛰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나라 선수들은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줬다. 대단한 평론가나 축구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유럽 축구만 보던 내 눈에도 굉장히 눈이 호강한다고 느꼈던 경기였다. 수준 높은 전술로 가나와 공방을 주고받으며 최선의 축구를 보여줬다.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보여주던 전술보다는 투지가 앞선 축구가 아니었다. 똑똑한 축구였고, 나는 너무 재밌었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졌는데 어떻게 재밌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심판의 판정에 불만이 있는데 어떻게 재밌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이는 졌는데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아이가 언제쯤 알게 될까.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들을 재미로 봐줄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어른들의 잘못이 크다. 이기지 못하면 재미없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재미있을 수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수시로 이런 생각을 심어준다. 생각은 강력하다. 작은 씨앗도 어느새 크게 자라난다. 한 번 자라난 생각은 쉽게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언제쯤 아이들은 재미를 재미로 받아들이게 될까. 놀이는 이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언제쯤 깨닫게 될까. 오늘은 마음이 답답하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