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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Dec 02. 2022

임기응변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임기응변을 하고 난 뒤 기분은 개운치 않다.

  날이 맑고 춥다.

  오늘은 천운이 따른 날이었다.

  지난밤부터 아이들과 할 체육 활동을 고민하던 중, 대학교 수업 시간에 들었던 킨볼이라는 뉴스포츠 종목이 떠올랐다. 체육관 창고를 정리하며 킨볼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두었고, 바람을 넣는 송풍기까지 구입해뒀던 기억이 났다. 킨볼을 언젠가 아이들과 하려고 미뤄두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전에 하던 플로어볼은 작은 아이들이 하기는 어려웠다. 작은 아이들은 큰 아이들에게 치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날아다녔다. 큰 아이들이 공을 잡으러 휘젓고 다닐 동안, 작은 아이들은 제 한 몸 건사하기 급급했다. 작은 아이들은 다쳤고, 나에게 와서 호소했다. 나는 내 생각이 짧았음을 알았다. 아이들이 한데 뭉쳐서 하는 놀이는 되도록 지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킨볼은 공격권과 수비권으로 나누어져, 서로 치일 일이 없다. 한 공간에서 진행하지만 다른 시간대에 진행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칠 일이 없다. 안전하고, 재밌다. 공은 크고 푹신하며 가볍다. 아이들은 큰 공을 치고받는 행동에도 즐거워할 것이다. 벌써부터 아이들이 즐거워할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설레는 맘으로 킨볼 경기 영상을 찾아본다. 경기는 생각보다 박진감 넘치고 매우 재밌어 보였다. 나도 수업 때 잠깐 듣고 체험해 봤을 뿐, 실제 경기를 보거나 해본 적은 없기에 낯설고 신기했다. 날렵하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도 안전하게 게임하는 모습을 보니 아이들에게 딱일 것 같았다. 나는 규칙을 적어두고, 바람을 넣기 위해 일찍 출근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풍선처럼 되어있는 킨볼 내피가 그만 터져버렸다. 바람을 다 채우지도 않았는데 터진 것을 보니 고무가 삭았거나 추운 날씨 덕에 얼어붙어있던 것인가 싶었다. 원인을 알아도 소용없다. 내피는 하나였고, 이제는 그것마저 없으니까. 당장 수업은 20분 뒤였다. 창고를 다 뒤져보느라 10분이 지났다. 내피는 없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10분 내에 수업을 구상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식상하지 않을 만한 재미있는 놀이, 아이들이 다치지 않을 수 있는 놀이, 잘하는 아이나 못하는 아이나 모두 즐길 수 있는 놀이. 농구를 변형한 게임은 너무 거칠어 다치는 아이들이 많았다. 플로어볼은 몸싸움이 지나치게 일어났다. 축구는 평소에 축구를 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고문과도 같았다. 그렇다고 장애물 달리기를 하자니, 장애물을 설치할 시간도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배구를 시작해야 하나, 고민했다. 배구는 6학년 아이들과 하고 있었다. 내가 배구를 미리 해버린다면, 아이들은 6학년 때 새롭게 배울 무언가를 박탈당하는 것 같다.

  플라잉 디스크를 이용한 피구를 하자. 고민 끝에 결정했다. 6학년 아이들과 재밌게 했던 놀이가 떠올랐다. 이름처럼 플라잉 디스크를 이용해서 상대를 맞히는 놀이다. 공격팀과 수비팀으로 나누어 공격팀은 원형 경기장 밖에서 디스크를 던지고, 수비팀은 잡거나 피한다. 잡으면 경기에서 제외된 같은 편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 제한 시간 동안 더 많이 살아남는 편이 이기거나, 더 오래 버틴 편이 이긴다. 단순한 놀이지만 6학년 아이들이 좋아했으니 5학년 아이들도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이 수업은 내가 구상한 수업이 아니다. 그저 임기응변이다. 나는 체육 수업을 하는 교사다. 놀이수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은 다가온다. 아이들은 일주일에 단 두 번 있는 체육 수업을 기다린다. 체육 수업만 기다린다. 아이들의 잘못도 아니고, 선생님들의 잘못도 아니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게 태어난 것이 죄라면 죄다. 나도 체육시간만 기다렸고, 내 선생님들도 체육 시간만 기다리셨을 것이다. 누구나 체육 시간만 기다린다. 그 체육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다. 더군다나 어제 아이들을 모아 두고 한바탕 훈계를 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오늘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아이들은 최대한 체육시간을 보장받아야 한다.

  게임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려워했지만, 금방 적응했다. 재밌게 놀았다. 움직여 피하고, 열심히 던졌다. 최선을 다해 놀았지만 서로 싸우거나 다투지 않았다. 운이 따랐다. 간단한 놀이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이야. 아이들은 늘 변화무쌍하다. 놀이를 열심히 준비한다고 아이들이 재미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놀이를 대충 준비한다고 아이들이 재미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어떨 때는 재미있게 하고, 어떨 때는 싸우고 다툰다. 나는 아직 그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내가 구상하며 재미있을 것 같아 기대했던 수업이 처참히 망하기도 하고, 오늘처럼 임기응변으로 준비한 수업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기도 하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보람찬 하루가 되었다. 아이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수업 연구를 더 철저히 해서, 아이들에게 기복 없는 수업을 선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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