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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선생님 Nov 12. 2022

꾀병은 생각보다 쉽게 낫는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으며 체육 시간을 점점 꺼린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움직이는 것이 귀찮아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몸이 커가며 근육이 그에 따라 같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움직이는 것은 귀찮고 힘들어진다. 내가 어릴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숨차는 느낌이 싫었고, 축구가 싫었다. (모순적이게도 지금은 축구를 좋아한다. 어릴 때 더 열심히, 많이 해둘걸 후회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어릴 때 체육 시간은 축구하는 시간, 피구하는 시간이었다. 늘 축구를 했다. 선생님은 어디 계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없고, 아이들만 있었다. 

  나는 그 때를 기억한다. 아이들이 체육을 왜 싫어하게 되었는지 옆에서 직접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신체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운동을 하게 되었다. 운동은 아이들에 맞게 변형되지 않았고, 늘 잘하는 몇몇 아이들 위주로 진행됐다. 잘하는 아이들은 주도적으로 체육 활동을 했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그저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나도 늘 벤치에 앉아 아이들과 이야기를 했다.

  내가 가르치는 시간에는 적어도 그런 일이 없었으면 했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게임을 재구성하는데 큰 공을 들인다. 팀을 나눌 때도, 게임을 진행할 인원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못하는 아이들도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도록, 그 안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한다. 물론 그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 못하는 아이들도 팀을 위해 일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몸을 움직이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 있다.

  예상대로 오늘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여자아이 서너명이 어딘가 아프다고 한다. 나도, 그 아이들도, 같은 반 친구들도 안다. 아이들은 아프지 않다. 하지만 아프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참여시키는 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잘 알고, 때때로 영악하게 그것을 이용할 줄 안다. 아프다고 이야기했지만 억지로 수업을 진행했을 때 결말은 두 가지다. 수업이 재미있게 흘러가서 결국 아프지 않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든지, 아니면 나를 아픈데도 억지로 참여하게 만든 교사로 모두에게 고발하든지. 나는 위험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직업이 좋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아이들을 못 본 채 했다. 아이들은 나무 아래로 가서 앉아있었다.

  게임을 설명하고, 시작했다. 게임은 단순하고 재미있다. 아이들도, 나도 이 게임을 정말 좋아한다. 아이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숨이 차서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도 뛰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뛰는 것을 멈추면 점수를 따지 못하게 되고, 점수를 따지 못하면 지기 때문이다. 지더라도 큰 불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은 있지만. 서로 잡고 잡히는 원초적인 놀이에 아이들은 푹 빠졌다.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요소도 마련해 두었기에 아이들은 자신의 체력에 맞게 쉬며 게임을 즐긴다.

  아프다던 아이들이 이제 몸이 괜찮아졌다고 이야기한다. 몸이 아프다고 쉬겠다고 하던 아이들이, 게임을 할 수 있겠다고 한다. 나는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아프다고 했으니 나도 고집을 세울까. 나도 고집을 부려 아이들이 게임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하나. 고민은 끝났다. 아이들에게 팀을 나누어 들어가라고 했다. 고민은 짧고, 후회가 남았다. 인간적인 감정이기는 하나 순간적으로 그런 고민이 들었다는 것이 창피하다. 교사가 되어 아이들에게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급급하다니. 나는 또 반성했다.

  어느덧 모두 섞여 게임에 열중했다. 한 아이가 내게 말했다.

  벌써 끝났어요?

  그래. 시간이 벌써 지났구나.

  공부할 때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면 좋을텐데.

  나는 웃는다. 어떻게 아이들은 이렇게 한결같을까. 나의 어린 시절과, 내 친구들의 어린 시절이 보인다. 아이들은 웃으며 들어간다. 나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아이들이 꾀병을 이겨내도록 만든 내 자신이 뿌듯했다. 아이들에게 맞는 운동을 준비해 스스로 꾀병을 이겨내고 참여하고 싶게 만든 내 자신이 대견했다. 교사로서 능력을 인정받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승리는 작다. 몇몇 아이들은 여전히 내 속을 썩이고, 또 체육 시간에는 다치는 아이들도 여전히 생긴다. 아이들은 여전히 나와 기싸움을 벌이려 한다. 오늘의 기쁨을 잠시 누리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고 고민해야 한다. 내일은 또 다른 아이들이 나를 기다린다. 나를 시험하기 위해,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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