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은 서둘러 잡혔다. 의사와 일정표는 늘 그렇게 결단력이 좋다. 환자의 마음속 속도와는 무관하게 의료 시스템은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그 흐름에 큰 저항 없이 몸을 실었다. 겁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아직 겁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도착한다.
수술은 끝났고 조직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 왔다.
“미분화 육종암입니다.”
의사는 차트를 보며 말했다. 설명이 이어졌지만, 그 문장 이후의 말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미분화. 육종암. 전이율. 희귀. 이 단어들은 의미라기보다는 소리로만 남았다. 마치 외국어처럼 분명 내 귀에 들어왔지만 아직 내 것이 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진료실을 나왔을 때는 대낮이었다. 햇빛은 지나치게 밝았고 병원 로비는 늘 그렇듯 분주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바삐 움직였고 나는 그들 사이를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걸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극장으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택은 꽤나 정직한 무의식의 결과였던 것 같다. 평소 일에 치여 살던 나는 ‘한나절의 여유’ 라는 상황이 주어지면 무엇을 하고 싶은 사람일까 생각해 보곤했다. 아마도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 ‘영화 한 편’ 이 저장되어 있었나 보다. 도망이라기보다는, 가장 익숙한 방식의 휴식.
영화는 <더 룸 넥스트 도어>였다.
줄리언 무어, 틸다 스윈튼.
이 두 이름만으로도 선택의 이유는 충분했다. 줄거리는 보지 않았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이 늘 그렇듯 그날의 선택도 즉흥에 가까웠다. 영화는 말기 자궁경부암 환자가 안락사를 준비하는 이야기였다.
스크린 속 인물은 죽음을 계획하고 있었고 나는 갓 ‘암 환자’라는 명찰을 달았을 뿐인 사람이었다. 좌석에 앉아 있으면서도 현실감은 여전히 부족했다. 울지도 않았고 특별히 놀라지도 않았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서 ‘하필’ 이라는 단어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영화관의 어둠 속에서 나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의 죽음은 아직 관념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대신 스쳐 지나간 생각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사람은 이렇게까지 준비할 수 있구나.’
‘마지막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아주 사소하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면 뭘 먹지?'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왔을 때도 세상은 변함없었다. 겨울이었고 작년 12월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로 들어왔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또 하루가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투병 생활이 일상이 되고 ‘육종암’이라는 말이 내 언어가 되었을 즈음 그날의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당신은 희귀암인 육종암입니다.”
그 문장을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내 머릿속에는 병실이 아니라 영화의 한 장면이 스쳤다. 어둠 속 스크린 조용히 숨을 고르던 나,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던 타인의 이야기.
그날 나는 아직 몰랐다.
암은 어느 날 갑자기 삶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아주 천천히 일상에 스며들며 사고방식을 바꿔놓는 존재라는 걸. 영화처럼 극적인 장면보다 그 이후의 반복되는 하루들이 더 중요해진다는 걸.
돌이켜보면 그날 극장에 간 나는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행연습을 한 셈이었다. 죽음을 상상해보는 연습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단어와 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 보는 연습. 그리고 그 안에서도 나는 팝콘 대신 평범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현실에 도착하고 있었다. 진단서와 영화표 사이 어딘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