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이 되면 부모님과 선생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것만 같았다. 성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이 따르고 가족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소한 얽매임에서 벗어나 어른들처럼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었던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옛날에는 성년식을 치루지 않으면 어른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년이 되면 남성들은 흐트러진 머리를 감아 상투를 틀었고 여성은 쪽을 찌고 비녀를 꽂는 관례를 함으로써 성년이 됨을 알렸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서구문화를 받아드림에 따라 자신의 신체와 복장에 대하여 자유롭게 되었다. 이러한 자유로 인해 성년이 되면 그동안의 학교 규율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유분방하게 즐기고 싶은 욕구가 분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맞이한 현실은 너무나 아팠고 답답하였다.
삶의 현장에 뛰어들기도전에 머리가 길고 콧수염을 길렀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때 긴급조치라는 괴법(壞法)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에서의 행동들 대부분이 죄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그렇더라도‘콧수염 장발’이라는 죄목으로 유치장에 감금(監禁)을 시키는 것은 상상을 넘어서는 초유의 일이였다.
고등학생 때였다. 어느 날 등교시간에 선생님들과 규율반장들이 교문 양옆에서 학생들에게 일일이 교복에다 리본을 달아주고 있었다. 리본에는‘10월 유신’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10월 유신'이 무슨 내용인 줄도 모르고 그것을 달고 다녀야 했다. 리본을 달지 않을 경우엔 교문 앞에서 한동안 손을 들고 토끼 걸음과 뜀박질로 벌을 받아야 했다. 또한 수업 시작 전 의례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헌장은 시험문제에도 나오기에 몇 년 동안 외우고 쓰고 낭독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후‘긴급조치’라는 괴법이 선포되었다. 국민들의 일상적인 긴급조치는 한마디로‘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라서 권력자의 입맛대로 법 집행을 할 수 있는 악법이었다.
괴법으로 인해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할 코미디 같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다.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거나 행동하지도 못하였으며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할 보편적 자유가 구속당하면서 인권은 무의미해졌다. 우리사회에 암흑이 도래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찾기 위하여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 ‘민주와 자유’라는 말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피의 보상이다.
군사독재정권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무용지물 되게 하였다. 어찌 보면 고려시대의 무신정권이 환생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헌법에 엄연히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그 시절의 우리는 그러한 자유를 박탈 당 하였고 독재정권에 의한 인권이 탄압을 받고 민주주의가 말살 당했던 암울한 시기에 사람이면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정의가 실종되고 자유가 목말랐던 혼돈의 시기였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성과물이다. 민주주의(democracy)의 시초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광장에 모여 토론과 투표를 통한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취하였다.
민주주의는 BC 5세기경,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BC 2세기에는 로마에 정복당하면서 2천 년 동안이나 후퇴하고 말았다. 법치국가에서도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이 유린당하는 사태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재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을 하였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광복 후 자유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유를 갈망하였지만 오히려 자유의 제약을 받았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인하여 4.19 민주혁명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하였다. 국민들의 자유 열망에도 불구하고 1961.5.16 군사 쿠데타로 인하여 민주정부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군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국민들의 자유로운 참여를 제한하였고 계엄령의 선포되면서 국민의 인권이 억압을 받자 대학생들의 데모가 곳곳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군사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하면서 계엄령과 함께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975년 5월에는 괴법인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국민들의 말과 행동과 복장까지 모든 것이 제약을 받게 되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게 되면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그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갔다. 그들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억울한 죄명으로 감옥살이를 하였다. 일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등 민주주의 암흑기를 보냈던 시기였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죽음을 불사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나는 군 입대를 앞두고 7080의 노래와 비틀즈,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팝송에 빠져들었고 청바지에 머리를 기르고 통기타를 치면서 그동안 갇혀 있던 욕구가 매료된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분출되었다.
사회가 우울한 가운데서도 젊은이들의 욕구가 음악으로 분출되어 대중적인 노래들이 히트를 치면서 젊은이들의 마음을 훔쳤다. 그러나 그러한 노래들을 사회질서를 문란 시킨다는 명목으로 금지곡이 되어 방송에서 들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모임에서는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고 가슴에 쌓여 있는 울분을 술과 노래로 풀어야 했다.
나는 미국 영화를 즐겨 보면서 서구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좋아했다. 머리와 콧수염을 기르고 팝송을 흥얼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는 잠시잠깐이었다. 어느 날 남자들은 머리가 길면 붙잡혀 강제로 머리를 밀어야 했고 여성들은 치마 길이가 짧으면 붙잡아 엎드려 자로 치마 길이를 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모든 것이 괴법에 해당되었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괴법으로 즉결심판을 받아 벌금을 물기도 하고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러나 생활에 제약을 받으면서도 자유를 향한 열망은 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거리를 활보하다 예기치 않은 일을 당하였다. 경찰들은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진을 치고 있었고 붙잡히게 되었다. 강제로 붙잡혀가서 무릎을 꿇리며 긴 머리를 깎을 것을 강요 하였지만 거부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즉결재판에 회부가 되었다.
재판소가 없었던 시, 군에서는 등기소 등 관공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판사가 순회를 하면서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대상으로 즉결재판을 하였다. 나는 재판에 앞서 일 년 넘게 길러온 머리를 아깝지만 깎아야 했다.
이대로 재판에 나갔다가는 군 입대를 앞두고 지장이라도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괜한 걱정을 할까 봐 머리를 단정히 깎고 즉결재판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 머리도 실컷 길러 보았고 머지않아 군 입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차피 머리를 단정히 깎아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렇게 재판에 임하면 훈계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큰맘 먹고 이발을 단정하게 하였다. 시간이 되어 재판정에 들어서니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판관은 한 명씩 이름을 부르고 죄명을 확인하고는 어떤 이는 훈방 조치도 하고 어떤 이는 벌금을 때리고 구류도 집행하였다. 죄명은 각양각색이었는데 대부분이 풍기문란(음주, 고성방가), 통행금지, 장발 등 우리 생활 속의 일상이 거기서는 모두 죄가 되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죄인이라면 개인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가볍다고 생각되는 것은 훈방 조치되었고 일부는 벌금을 받았다. 통행금지 위반은 구류 2~4일이 보통이었다. 장발로 걸려온 사람은 ‘나’ 외에는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차례가 가까워졌다. 내가 판결받기 전 바로 앞 청년은 죄명이 통행금지 위반이었다. 재판장이 늦은 시간에 왜 나왔느냐고 물었다.
그 청년은 부모님이 갑자기 아파서 약을 구하려고 나왔다고 하였다. 재판장은 그 시간에는 약국들이 문을 닫았는데 거짓말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불순한 의도가 있다면서 구류 4일을 선고하였다. 그 청년은 너무 억울하였던지 재판장에게 다음부터는 늦은 시간에 다니지 않겠다며 호소를 하였다. 그러자 재판장은 청년이 이의를 제기한다며 3일을 추가하여 구류 7일을 선고하였다. 그 청년은 더 이상 항변할 수가 없었던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음은 내 차례가 되었다. 재판관은 내 이름을 불렀다. 재판관은 나의 머리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머리를 단정하게 잘 잘랐구먼.”하였다. 그 순간 나는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이발을 하기 잘했다고 생각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재판장은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재판장은 잠시 후 “콧수염이 장발이구먼.”하고 비꼬는 투로 말을 하더니 “구류 3일에 처한다.” 하면서 망치를 두드렸다. 나는 젊은 혈기에 그만 폭발할 뻔 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앞 청년이 한마디 더 하다가 7일에 처한 것을 보면서 억울한 심정에 가슴이 요동쳤지만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초헌법적인 억압이 결국 1979.10.26 사태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민주의 봄을 기대했는데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1980.5.18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는 참혹한 암흑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자유는 1960.4.19로 시작한 30년간의 군부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주의의 봄이 오기 시작하였다. 이 자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렵게 얻은 소중한 민주주의를 결코 방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시민의식과 참여정신이 있어야 진정한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콧수염 장발이라는 죄목이 있을 것이라고는 정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콧수염 장발’로 유치장에서 3일을 보낸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었을까? 웃지 못 할 코미디 같은 일이었다. 그 당시에는 법이 필요 없었다. 판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곧 법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후 인생에 대하여 고뇌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왜 이래야 하는지 생각하였다. 그릇된 사회를 보며 시민 불복종이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하면서 무력함을 느꼈고 그로 인해 술을 마시는 시간이 잦아졌고 방황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개인이 자유롭게 사유하면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민주화를 겪어보지 않은 세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며 숨 쉬는 자유가 그렇게 고귀함을 경험을 통해 통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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