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by 콧수염장발

편 지





나른한 오후 우연히 라디오를 켜니 폴 모리아의 위대한 사랑이 전파를 타고 흐른다. 바쁜 일상에 젖어 잊고 지냈는데 오랜만에 좋아하던 음악을 듣는 순간 옛 소녀가 불현듯 떠올랐다. 군 생활을 하면서 낮선 소녀에게서 오는 편지는 큰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편지 속에는 항시 그리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시절의 음악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잠들어 있던 편지의 추억을 흔들어 깨웠다.


예전에는 길을 걷다 빨간 우체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왠지 마법에 걸린 것처럼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 지면서 우체통을 한동안 바라보곤 했었다. 저 우체통 안에 내가 기다리는 편지가 있기라도 한 듯 괜스레 마음이 설레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빨간 우체통이 지역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마을회관 앞에나 도심의 중요지점에 우체통이 설치가 되어 있어서 지역을 찾는 손님들에게는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 이제는 그러한 우체통을 볼 수가 없게 되어서 아쉽기만 하다. 도시의 일터로 떠난 친구들과 낮선 소녀의 편지.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의 예쁜 카드를 정성스럽게 골라서 빨간 우체통에 넣고 돌아서면 마음은 한없이 풍요로웠는데 이제는 손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었던 기억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요즘은 휴대전화로 실시간 소통할 수 있으니 손 편지를 쓸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더욱 나는 예전의 아날로그 방식의 손 편지가 그립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없었고 유선 전화도 마을에 몇 집뿐이었다. 급한 일이 있으면 먼 거리를 걸어 전화국에 가서 전보를 쳐야 했다. 전보도 글자 수에 따라 요금이 부과되었기에 돈을 절약하고자 최대한 글자를 줄여서 용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을 보내야 했던 시절에 편지는 중요한 소통의 창구였다. 편지를 보내고 답신을 받기까지는 약 보름정도의 시일이 소요됐다.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올 때쯤이면 집배원 아저씨의 빨간 자전거가 기다려지곤 하였다. 당시의 집배원 아저씨는 희망을 전달하는 전도사였다. 편지뿐만 아니라 마을 어른들의 개인적인 일까지 해결해주어서 모두가 반기며 좋아하였다. 그렇게 기다려지던 편지가 요즘에는 반갑고 설레는 것보다 왠지 무겁고 두근거려지는 일들 밖에 없어서 씁쓸하다. 각종 우편물은 기관에서 보내는 납부고지서가 대부분이고 알 수도 없는 곳으로 부터의 초청장과 상품 광고 뿐이다.


젊은 날에 누구나 한번은 써보았을 연애편지는 추억이었다. 중학교 때 어느 소녀에게 편지를 써서 건넨 적이 있었다. 그 뒤에는 친구의 소개를 받아서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때 쓴 편지들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맑은 영혼을 가지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였던 것 같다. 편지가 도착하면 때론 가족 누군가가 먼저 열어 볼 수도 있었다.


그때는 왠지 쑥스러웠고 순수한 영혼이 타인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올 때쯤이면 곧장 집으로 먼저 달려와서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곤 하였다.

집배원아저씨를 기다렸다가“아저씨 혹시 저에게 온 편지 없어요?”하고 물으면 아저씨는“오늘은 없는데, 여자 친구 소식 기다리는 거야?”하고 웃으시면서 놀리곤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다음에는 꼭 저에게 주셔야 해요.”하면서 부탁을 하였다. 편지속의 소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오랜 친구처럼 편안함 속에서 글을 주고받았다.


나는 군에서 문서취급소에서 복무를 하면서 어느 소녀와 2년이 넘도록 편지를 주고받았다. 군대의 딱딱한 병영 문화와 어려운 고비마다 그 소녀의 편지는 무료하지 않게 보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우리는 어김없이 답장을 주고받으며 때로는 서로 지지 않을 정도의 많은 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유난히 음악을 좋아하였다. 그녀의 편지 속에는‘폴 모리아 악단’의 아련한 경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새로운 팝송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나는 군에 입대하기 전 별밤지기 팬이었기에 그녀와 음악을 공유하면서 편지로 마음을 나누었다. 그러나 듣고 싶어도 군에서는 그러한 음악을 들을 수는 없었다.


60년대 후반 중학교 때 친구의 형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고 전역을 하면서 가지고 나온 기념품 함이 나의 키를 넘을 만큼 큰 궤짝이었다. 친구는 그 궤짝 안에 있던 물품을 자랑처럼 보여주었다. 그 안에 있던 물품들은 우리나라에서 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진기한 보물 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중에 탐나는 것은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카메라와 디지털라디오였다. 친구는 자랑삼아 들고 다녔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그 카메라와 디지털라디오가 눈에 아른거려서 한동안 잠을 설쳤다. 가끔 친구의 것을 빌려서 듣기도 할 때마다 더욱 가지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그러나 시중에는 그러한 제품을 볼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 디지털라디오를 힘들게 구입을 하게 되었다. 그 후에 워크맨이 나와서 나의 소중한 보물이 되었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밤 10시가 되면 청소년의 귀가 시간을 알리는‘폴 모리아 악단’의 시그널 음악을 들으면서 귀가를 서두르곤 하였다. 무엇보다도‘별이 빛나는 밤’의 프랑크 푸르셀 오케스트라의 머시쉐리 시그널 음악은 감성의 늪으로 빠지게 하였다. 놀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별밤지기 음악을 듣기 위하여 자리를 뜨곤 하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들어도 가슴이 뛰면서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그녀가 좋아하는 음악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되었다. 군복무를 하면서는 그런 음악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음악이 너무 생각 날 때쯤이면 잠시 외출을 하여 시내 다방에 들어가 DJ에게 곡을 신청하여 기다렸다가 들을 때가 있었다. 때로는 불빛 아른거리는 가게에 앉아 쓰러지는 술병 앞에서 한 잔의 술을 들이키며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이야기에 마음을 적시면서 군인답지 않은 감성에 젖어 들기도 하였다.


문서취급소는 모두가 행정병들이기에 글씨를 바르게 잘 쓰는 것은 기본이었다. 각 참모부에서 전보를 치러오면 글자 한자, 한자를 오타가 있는지 세밀히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년병 때에는 군기가 잡혀 정성을 들여 또박또박 글씨를 쓰게 되었다. 선임자들이 맘에 들어 하면 가끔씩 연애편지를 대필시키곤 하였다. 한 선임자의 편지를 대필하면서 나의 편지까지 쓰는 것은 힘든 일이 되었다. 야간 근무 시간은 편지를 쓰는 맛난 시간이었다.


초병의 수습 기간이 끝나면서 문서 업무를 본격적으로 처리하게 되었다. 지금이야 컴퓨터로 처리하면 되지만 당시에는 모든 공문서의 기록은 갑, 을, 병으로 되어 있는 용지에다 먹지를 끼우고 수백 건의 공문서를 수, 발신과 제목을 기록하여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여 문서를 발송해야 했기에 바른 글씨가 어느 순간 졸필이 되어 버렸다. 그제야 선임자들의 삐뚤어진 글씨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소녀에게 편지를 부치기 위하여 시내에 있는 우체통에 편지를 집어넣고 돌아오는데 부대에서 수집한 공문을 편지와 잘못 바꿔 넣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너무 당황하여 앞이 캄캄하였다. 만약에 문서를 분실하게 된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공중전화기를 붙들고 우체국 직원과 연결을 한 후 다급한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담당 직원과 통화를 하는데 그는 다음날 편지를 수거하는 시간을 알려주면서 그 시간에 기다리고 있다가 찾아가라고 하였다. 나는 잠을 설치고 다음 날 시간에 맞춰 우체통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문을 찾았다. 그 일로 인하여 소녀의 편지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휴대 전화가 보급되면서 손 편지를 쓰는 일이 없어졌다. 전화가 편지를 대신 하게 되었고 기다릴 필요 없이 순간적으로 소통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빠르고 편리함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진정성과 감동이 떨어지는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하얀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한자씩 써 내려가는 진지함에서 인간의 내면을 알게 되는데 이제는 그러한 진정성과 낭만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오늘도 그 옛날처럼 누군가에게 진솔함의 편지를 보내고프다. 그러나 누구에게 써야 할지 선뜻 손길이 가지 않는다.

내 마음의 감성이 마르고 삶에 여유를 찾지 못함인가보다. 사랑하는 대상이 저 멀리 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먼지에 덮여 빛바랜 편지를 우연히 볼 때가 있다. 그 순수함의 마음들이 어디에 있을까? 하늘의 별에 있겠지…….


그 모든 것들의 빛이 이제 바래졌나 보다. 반짝이는 별빛을 보다가 옛적에 별밤지기의 음악을 좋아했던 소녀의 음악이 되살아나면서 어니언스의 편지가 잠시 흘러간 세월을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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