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자에게 빵이 있나니
나는 때에 따라 떡순이가 되기도 했고, 빵숙이가 되기도 했다. 이름하야 김떡순과 김빵숙.
떡순이가 된 것은 순전히 엄마 때문이다. 냉동고에 상시 쑥떡을 쟁여두던 진희 딸 답게 내 입은 주기적으로 떡을 찾았다. 빵순이가 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엄마 손 잡고 가던 주일학교 탓이다. 주일학교에서는 매주 빵을 간식으로 줬다. 반달 모양 슈크림빵, 둥근 단팥빵, 길쭉한 버터크림빵과 땅콩크림빵 중 한 가지를 고를 수 있었다. 지금은 한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빵이 당시로서는 내 두 손을 합친 것보다도 컸는데, 나는 빵 하나를 오롯이 혼자서 다 먹곤 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떡순이와 빵순이는 떡집과 빵집을 발견하면 정신을 못차렸다. 떡과 빵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탐스러움 그 자체다. 나는 (특히나 초행길 또는 처음 가는 동네일수록) 길을 가다 떡집과 빵집을 발견하면 선악과에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과지출을 했고, 무지성으로 과식(또는 폭식)을 했다. 거울에 비친 남산만한 배를 보며 스스로를 미련하다 여길 정도로.
건강과 재정이라는 삶의 핵심 카테고리에 이상 신호가 켜지면서 무지성 빵떡 소비와 과식을 줄이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약을 처방해주시며 정제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라고 하셨다. 그때부터였다. 몸에 자리한 혹 덩어리를 줄여야 하는 (궁극적으로는 사라지도록 하는) 미션이 나를 변화로 이끌었다. 진열대에서 떡과 빵이 나를 유혹해도,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나를 시험해도, 침 한번 꿀꺽 삼키고 모른 채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초반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조금씩 섭취량을 줄여 나가며 식습관을 바꿔나갔고, 정기적인 추적 검사를 통해 혹이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수치로 확인하며 수월하게 습관을 개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주, 유난히 빵이 먹고 싶었다. 지난 주부터 먹고 싶었던 소금빵을 꾹 참고 있었더니 억눌린 욕망이 새어나왔나보다. 욕망을 부추기는 건 내 생활반경이 한몫 한다.집이든 회사든 헬스장이든, 어디서나 생활반경 100M 내면 황홀한 빵맛을 맛볼 수 있다. 빵지순례의 트로이카이기 때문이다. (연남동 - 합정 - 망원)
집 앞엔 오래도록 동네 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망원에 2호점을 오픈한 ‘버터 베이커리’는 물론, 연남동 신흥 빵집 강자로 떠오르는 ‘모리노빵’, ‘연남제빵소’, ‘거니노룰즈’가 있다. 회사 근처엔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는 쌀빵 맛집, 심지어 블랙핑크 제니가 샤랴웃(shout out)한 포포 브레드가 있다. 헬스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엔 든든한 건강 식사빵 ‘그랭블레’와 성산동 동네빵집 ‘키다리아저씨’와 ‘베이커리 봉교’가 자리하고 있으니… 매일 지나는 곳마다 시험거리가 가득한 셈이다.
미친 사람 같겠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 밤낮 오매불망 상대방을 떠올리는 것처럼 빵을 떠올렸다. 출근길이면 ‘모리노팡’과 ‘연남제빵소’에 들르고 픈 마음이 굴뚝처럼 올라왔고, 점심 시간이면 ‘포포 브레드’에 가서 맛있는 빵 한끼를 먹고 싶었다. 퇴근 후 헬스장에 갈 때면 ‘버터 베이커리’를 피하기 위해 건너편 길로 돌아갔고, 헬스가 끝나면 단백질 쉐이크를 마시며 빵집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뭘 그렇게 까지 하냐, 그냥 한 번 맛있게 먹으면 되지’ 하며 유난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맞다. 유난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유난을 떨 만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 2주 연속 체중 감량이 쭉쭉 진행 중이다. 식단 탓인지, 유산소가 탄력을 받은 탓인지, 정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체중이 줄지 않는 마의 구간을 드디어 깬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식단을 지키고 싶어, 계획에 없는 빵 섭취를 피하고 싶었다.
둘. 냉동고에 문이 사다준 ‘밀도’ 식빵이 두 종류나 잠들어 있다. 하지만 담백 식빵과 리치 식빵 모두 흰 빵으로 내 기호와는 거리가 있었다. 거칠고 질긴 식사빵을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나, 냉동고에 빵이 있었기 때문에 ‘못 참을 정도로 빵이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어’지면 사지 않고 냉동고에 있는 빵을 데워 먹기로 다짐했다. 가계부를 기록하며 지출을 줄이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이런 나름의 이유로 유난을 떨며 빵을 참았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금요일 아침 출근길 ‘포포브레드’의 럭키박스를 구입하는 것으로 분출되었다.( 럭키밀은 가게에서 남은 빵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다.)
출근길 ‘럭키밀’에 접속한 게 화근이었다. 대게의 동네 빵집이 입점한 럭키밀을 열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포포브레드’의 럭키밀 구매 수량이 한 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포포브레드’는 럭키밀이 오픈되자마자 품절되는 것으로 유명한데 누군가가 밤새 예약 취소를 했나보다. 그걸 발견한 순간, 나는 BTS 콘서트 포도알을 발견한 사람마냥, 그러니까 며칠을 굶주린 채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마냥, 달려들었다. 낚아채버린 것이다. 한주 내내 ‘포포브레드’의 럭키밀 오픈 알림이 뜰 때마다 모르쇠했건만, 누군가 취소한 럭키백 하나에 일주일 한땀 한땀 참아온 인내심이 도루묵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두 천사와 악마가 내 안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아온 게 아깝지 않아? 빵이 먹고 싶으면 냉동고에 있는 식빵을 먹기로 다짐했었잖아-!’
‘잘했어. 빵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닌 거 알잖아. 지금 네가 먹고 싶은 건 딱 포포브레드의 그 빵이야-!’
일종의 죄책감과 본능에 충실한 욕망이 자꾸만 부닥쳤다. 나는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일종의 죄책감을 모른 척하고 욕망 편에 섰다.
‘그래, 잘했어. 그동안 잘 참았어. 오늘 맛있게 먹고 다시 시작하면 돼.’
그런데 놀랍게도 사무실에 발을 들이니 분탕질 마냥 시끄러웠던 내면이 평화로워지며 이성이 돌아왔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다시 ‘럭키밀’에 접속해서 럭키백을 취소했다. 다행히 가게 측으로부터 럭키백 예약 확정이 되기 전이어서 수수료도, 가게에 미안한 마음도 없이 럭키백을 취소할 수 있었다.
‘포포 브레드 럭키백은 매일 알람이 울리니까 언젠가 한 번은 빠르게 예약할 수 있겠지!’
‘럭키백이 아니어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잖아? 오늘 참은 거 잘했어!’
다짐한 것들을 깡그리 무너뜨리는 무지성에 잠시 허우적거렸으나 다시 돌아온 이성을 칭찬하며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쑥쑥이! 화이트롤 사갈까?”
문이었다. 야간 근무 마치고 머리를 자르러 망포역에 간다고 했었는데, 미용실 뒤편에 자리한 ‘하얀 풍차’를 보니 생각이 났나보다. 문이 사다준 ‘하얀 풍차’의 화이트롤을 감탄하며 먹었던 그때가. ‘화이트롤’이라는 말에 지루하던 업무에 도파민이 삭 돌았지만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내꺼 말고 오빠 맛있는 점심 먹고 와~”
그날 저녁, 여느 금요일처럼 문네 집으로 퇴근을 했다. 어두컴컴한 집안. 야간 근무를 마치고 망포까지 다녀온 문에게는 한밤의 시간이었다. 문은 도어락 소리에 깼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뜬 상태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나를 반겨줬다.
“쑥쑥이 고생했어~~~ 자자!”
그러면서 나를 품에 가두고 다시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러고는 잠꼬대처럼(눈은 절대 뜨지 않은 채로
!) 어물거리며 하는 말.
“쑥쑥이 이따가 깜빠뉴 먹어야 해”
“토마토바질깜빠뉴랑 쑥떡쑥떡이랑 메론크림소금빵이랑 먹어야 해”
‘괜찮아!’라는 답변을 가벼이 무시하고 기어이 빵을 사러 ‘하얀 풍차’에 들른 문은 그간 먹어보지 않은 빵 중 내 취향에 맞을 것 같은 빵을 집어왔다고 했다.
“소금빵이 다 팔린거야. 그래서 메론크림소금빵으로 대신 사왔어.”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나서는 할 말을 다 마쳤는지 다시 깊은 숨을 내쉬며 잠이 들어버렸다. 빵 먹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어떻게 내 맘을 알았는지 빵을 한가득 사온 문. 다른 때보다 유난히 더 기특하고 예뻐서 잠든 그의 하얀 볼을 손으로 비비다가 왕-하고는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강릉 ‘아기궁뎅이’ 빵처럼 매끈하고 퐁신퐁신한 문의 볼따구.
‘퐁신퐁신 문 볼따구 빵’을 물자 진짜 빵이 먹고 싶어져서, 스르르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식탁 위에 올려진 ‘토마토바질깜빠뉴’와 ‘쑥떡쑥떡’,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둔 ‘메론크림소금빵’을 보니 절로 함박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레 바스락거리며 빵을 잘라 먹었다. ‘토마토바질포카치아’는 쫄깃쫄깃 건강빵이 먹고 싶었던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고, 쑥떡쑥떡은 김떡순과 김빵숙의 취향을 200% 만족시켰다.
그날밤, 한주의 마지막 야간 출근을 하는 문을 배웅하며 말했다.
“오빠! 나 너무 행복해! 빵 사다줘서 고마워!”
행복함은 잠이 드는 순간까지 지속됐다. 문이 없는 밤인데도 빵에 담긴 그 마음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아 황홀한 밤이었다.
‘내일은 오빠랑 메론크림소금빵 나눠먹어야지!’
내일 먹을 빵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반. 도어락 소리에 잠이 깼다. 부스스 눈을 비비며 문을 마중하러 나갔는데, 보통날과 같다면 나를 안아줘야 할 그의 손이 무겁다. 뭔가를 잔뜩 들고는 가만히 서서 수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문.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집안에서 그의 왕방울만한 눈이 말똥말똥 빛났다. 수상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 문. 그러더니
“쑥쑥이 아침 먹자~~”
하며 손에 든 것을 식탁에 내려 놓는데… 세상에…!
“쑥쑥이가 말했던 ‘맥도날드 과카몰레 맥모닝’!”
“쑥쑥이가 궁금해했던 뚜레쥬르랑 농심 콜라보 제품들!”
“그리고 쑥쑥이 지역 명물이랑 콜라보하는 거 좋아하잖아. 이건 충남 예산 쪽파가 들어간, 방금 구운 따끈한 고로케!”
“그리고 마지막, 소금빵!!”
식탁이 순식간에 온통 빵으로 가득해져버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갑작스레 빵부자가 되어버렸다. 빵이라면 절대 돈 주고 사먹지 않는 그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이렇게나 가득히 빵을 사오다니!
‘이건 먹어야 해!’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각고의 인내로 빵을 참아온 나의 노고를 하늘이 갸륵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결정을 해버리고는, 나는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말했다.
“오빠! 우리 뭐부터 먹을까?”
‘과카몰레 맥모닝’ 시리즈로 시작된 빵파티는 그날 야식으로까지 이어졌다. 쫄깃쫄깃 식사빵부터 퐁신퐁신 달달한 간식빵까지, 참으로 풍요로운 토요일이었다. 토요일의 끼니를 모두 채워준 풍성한 빵은, 문이라는 천사를 통해 하늘이 내려준 일용할 식사였다. 오늘의 일용할 빵식.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낸 자가 일용할 빵을 얻을 것이니라.’
토요일이 내게 준 교훈이었다. 하지만 주의할 점. 빵으로 인한 행복은 체중 증가를 불러온다는 것. 1.75kg 증가와 맞바꾼, 빵빵하게 충만한 토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