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오빠 결혼 준비는 잘 되고 있대? 아니 며칠 전에 오빠 웨딩사진 봤는데 입이 아주 귀에 걸렸더라? 웬일이야 진짜. 대원오빠가 결혼이래 너무 웃겨.”
“지금 우리 오빠 말하는 거 맞지? 뭐야? 우리 오빠 결혼사진을 봤어?? 어디서 봤는데???”
“오빠가 메신저 프로필 배경 사진으로 해 놨던데? 뭐야 너 아직 안 봤어?”
안 봤다. 아니 아직 못봤다. 이렇게 말하니 오빠와 나 사이가 일 년에 연락 몇 번 하지 않고 지내는 멀고 먼 남매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정말 연락을 자주 한다. 메신저든 전화든 가리지 않고 "뭐하냐"를 묻는다든지 갑자기 띡-하고 식사 메뉴를 찍어서 보낸다든지 하는 식이다. 제주로 발령이 난 탓에 우리 가족 중 가장 먼저 독립을 시작한 오빠는 시시콜콜한 일로 시시때때 가리지 않고 동생들에게 전화를 해댔다. 같이 살 적에 귀갓길이면 막내에게 전화해서 "집에 누구누구 있어? 뭐 먹고 싶어? 사갈까?"를 물어보더니 제주로 간 후로는 "무슨 치킨 먹고 싶어? 말해봐 오빠가 기프티콘 보내줄게."하며 멀리서도 여동생들의 간식배를 종종 책임져 줬다. 생각해보면 연락의 8할은 오빠로부터 시작되었다. 며칠 전엔 연락이 오더니 대뜸 "오빠가 우리 은숙이도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그래."하며 빵 쿠폰 20,000원을 보내줬다. 서울에 적응하느라 지친 나를 위로하는 오빠만의 방식이었다. 어제는 그룹 화상 통화로 우리 셋을 소집시키더니 불금을 같이 보냈다. 오빠와 동생들의 터무니 없는 웃긴 표정을 보고 있으니 한 주의 긴장이 사르르 녹아 내렸다. 무섭지도, 외로지도 않게 잠 들 수 있었다.
주저리주저리 오빠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는 오빠를 자랑해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연락을 얼마나 자주 하는 사이인지 말하기 위해서이다. 타이밍 참 놀랍게도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오빠는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은 결혼식을 두 탕 뛰어서 매우 피곤한 상태이니 하루만 헬스를 쉬겠다는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같이 전주에 살던 시절, 하루는 아연이가 오빠에게 말했다. "오빠는 왜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오빠 일상을 생중계하는 거야?" 그렇다. 오빠가 동생들을 잘 챙기는 살뜰한 사람인 것은 인정이지만 오빠는 성가신 부분도 있었다. 우리는 오빠의 식단 메뉴부터 옷차림, 운동 루틴과 여자친구 선물, 회사에서의 고민 등 오빠의 많은 부분을 (애석하게도 그렇게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했다. 오빠는 우리에게만큼은 자기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소위 tmi를 남발했다. 그런데 그런 오빠가 우리에게 웨딩사진으로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니? 그룹 메신저에 사진 한 장 보여주지 않고 슥 메신저 배경사진에 걸어 놓았다니? 나의 절친이자 오빠의 대학후배 그러나 오빠와는 족히 4-5년은 연락할 일 없었을 유미도 본 오빠의 결혼사진을 모르고 있었다니... '오빠는 왜 이런 중요하고 재밌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별로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들만 늘어 놓는 거야?'라고 슬쩍 말해보고 싶지만 오빠 탓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동생들은 오빠 배경사진에 걸린 결혼사진을 봤다고 한다. "언니는 그걸 이제 알았어?" ... 나의 무심함 때문 것으로 결론 내린다.
사진 속 오빠가 활짝 웃고 있다. 수줍음이 비치는 미소지만 윗니가 훤히 들어날 정도로 시원하게 활짝 웃고 있다. 턱시도 입은 모습은 영락없이 20년 전 초등학교 학예회에서 턱시도를 차려 입었던 영락없는 꼬마 같아서 실소를 자아내는 오빠가 두 달 후 결혼을 한다. 실은 우리는 걱정했었다. 오빠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먼지 한 톨, 어금니에 낀 고춧가루만큼의 의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시누이가 셋인 오빠에게 누가 오기나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빠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 그래서 생각 했다. ‘오빠가 짝꿍이 생기면 정말 잘 해줘야지. 그 사람한테 정말 잘 해줘야지.’
오빠는 성실하고, 다정하고, 바른 사람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우리 오빠 같은 사람 만나고 싶어.’라고 말할 정도로 오빠는 참 괜찮은 사람이다. 오빠는 한 번도 힘으로 동생들을 찍어 누른 적이 없다. 열여덟, 학교를 그만두고 은둔형 외톨이로 암울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 뾰족뾰족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는 짐승에 가까웠다. 소통이라든지 대화라든지 하는 것들을 몰랐고 나의 수단은 오직 침묵 아니면 고함이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가족들은 나를 힘들어했고, 아빠와는 단절과 고함이 반복되었는데, 그때도 오빠는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르지 않았다. 견디고 참았다. 그러다 딱 하루, 라면을 끓이다가 오빠의 뚜껑이 열려 버렸다. 어떤 경위였는지 모르지만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고함을 지른 나와 그런 내 종아리에 회초리 두 대를 때린 오빠가 선명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오빠에게 맞은 것.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지만, 그 짧은 순간마저 동생에게 손찌검할 수 없어서 고민하고 회초리를 든 오빠가 나는 좋다.
은둔형 외톨이로 나밖에 모르던 시절, 막내의 일기장은 오빠 이야기로 가득하다. 당시 대학생이던 오빠는 수업이 끝나면 애경이 먹을 것을 사서 귀가했다. 라면, 핫바, 카레, 과자… 혼자 집 지키는 시간이 많던 막내에게 오빠는 열한 살 차이가 무색한 막내의 다정한 친구였다. 오빠는 청소기,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에도 가장 부지런했다. 빨래와 설거지에 게으른 우리 몫까지 오빠가 부지런을 떨었다. 가끔 프라이팬, 기름, 가위만으로 세상의 모든 요리를 할 수 있다는 듯 요상한 요리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먹는 데에는 흐름이 끊기지 않아야 한다며 (거의) 종일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탓에 전자레인지를 고장 내고야 마는 엉뚱함을 소유하기도 했지만, 오빠는 이로웠다. 아침 일찍 셀프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일찍 도서관을 향하고 밤늦게 수험 공부를 마치고 와서도 까탈 한 번 부리지 않던 사람. 성실하고 바른 사람. 엄마 돌아가신 후 오빠는 우리에게 엄마였고, 언니였고, 오빠였고, 친구였다.
오빠와 나는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 활동을 했다. 처음 그곳을 찾은 날을 잊을 수 없다. “어머~ 네가 대순이 동생이구나?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유인즉슨 학교를 자퇴하고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하던 나는 오빠의 아프고 아픈 손가락이었고, 기도 제목을 나눌 때면 오빠가 항상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말금이 이번에 수능 보는데 저랑 같은 학교 다니면 좋겠고, 은숙이가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캠퍼스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4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날이 선선한 저녁이면 오빠는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나와 나란히 걸었다. 흐드러지는 벚꽃길을 걸었고, 아파트 담장 너머로 선명한 장미길을 걸었고, 핫도그를 먹었고, 편의점 소프트콘을 먹었고, 강아지를 보고 도망가기도 했고, 쥐를 보기도 했다. 보통의 골칫거리가 아니던 나의 망나니 시절의 고해성사를 오빠에게 털어놓기도 했고, 좋은 딸, 좋은 언니가 되고 싶은 수줍은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게 걸으면 옛날이 떠올랐다. 오빠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등교하던 시절. 오빠는 찡그린 얼굴로 ‘아!’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기어이 날 태우고 오르막을 올랐다. 오빠와 걸으면 ‘그래. 집 가서 다시 잘 해보자!’ 하는 마음이 솟았다. 트러블메이커를 청산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차곡차곡 차올랐다.
사이 좋은 시절을 뒤로하고 오빠는 군대에 가야 했다. 오빠는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군대에 갔다. 오빠라는 윤활유가 자리를 비워도 집이 안정될 수 있을 때를 기다린 것이다. 다행히 오빠와 대학 생활을 하는 2년 동안 나는 맏언니 역할을 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부지런한 몸을 장착했고, 오빠가 없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우리는 자라 있었다.
오빠가 군대 가기 전, 동아리 사람들이 오빠를 위한 파티를 열어줬다. 놀림과 격려 가득한 파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 삼아 오빠에게 한 사람씩 다가가 악수를 하거나 한 마디씩 인사를 건네는 시간을 가졌다. ‘아 오빠가 정말 군대를 가는구나.’ 묘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인사를 해야 해 말아야 해?’하는 내적 갈등과 함께. 뒤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앞 사람들 차례가 다 끝나버렸다. 쭈뼛쭈뼛 오빠에게 다가갔는데 오빠가 나를 안아줬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야 김은숙, 진짜 그게 뭐라고 대순이가 너 안아줄 때 눈물이 핑 돌더라?” 그 밤, 언니들이 이야기해줬다.
장손에 장남인 바른 청년 오빠는 알고 있었다. 오빠가 져온 첫째의 무게가 이제 나에게 올 것이란 것을. 그리고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집을, 그러니까 아빠와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부디 건강하라고.
훈련소 입소하는 오빠를 배웅가서 나는 울고야 말았다. 그 엄숙하고 무거운 이별이 무서워서, 혹시 이게 이생에서 오빠와의 마지막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서 울어버렸다. 그 학기 서양 전쟁사 수업을 들었는데 수업을 들으면 오빠 생각이 밀려와 수업 끝나고 펑펑 울었다. 하지만 강하게 잘 버텼다. 오빠도, 나도, 우리도 잘 버텼다. 오빠가 없는 동안 우리는 자랐고 아빠와 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갔다.
그로부터 어언 10년이 지났다. 결혼을 앞둔 오빠는 좋으면서도 투정 부린다. “너네랑 이렇게 놀고, 맛있는 거 시켜 먹고, 애경이 먹고 싶은 거 사주고… 하. 예전처럼은 못하겠지? 그런 게 좀 아쉬워.” 오빠는 여전히 동생들이다. 그런 오빠가 고마우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한다. ‘새언니에게 진짜 잘해야지.’
언젠가 아빠가 말했다. “결혼하고 지 새끼들 생기면 다 그렇게 되더라.” 쓸쓸해 보였고, 내 입에서조차 씁쓸함이 까끌거리는 것 같았다. 어른이 되고, 한 명 한 명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게 우리의 단절이 되어버리면 슬프지 않을까? 삶의 형태는 끊임없이 바뀌겠지만 우리의 사랑을 확장하고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엄마에게 부탁해 본다. 엄마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은 서로가 전부이니까. 한 명 한 명이 우리의 모든 것이고 삶의 원천이니까. 첫째가 아니어서, 오빠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