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숙 Jul 05. 2022

아빠를 안아줘

-아빠

나는 애정 표현이 서툴다. 특히 아빠에게 그렇다. 이직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겨우 “아빠 사랑해”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서른이었다. 그마저도 “큰딸 사랑해~^♡^”라고 아빠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부녀간 사랑고백은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기까지 30년이 걸렸는데 스킨십은 오죽할까. 아빠에게 안겨본 기억도 없고 아빠를 안아준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하다. 

아, 이것은 안긴 것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일곱 살 어린이집 체육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체육대회는 아버지들이 자녀를 목마 태워 입장하는 퍼레이드로 시작할 참이었다. 우리는 아빠 손을 잡고 열을 맞춰 대기하다가 진행 강사의 "입장" 소리와 함께 쑤욱 아빠의 무등에 올라탔다. 두근두근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는 순간 ‘읍... 끄... 흐읍..!!’. 웅장한 퍼레이드가 나에게 선명하게 남긴 것은 기억은 끄응차 힘을 주는 아빠의 신음소리. 나는 어서 퍼레이드가 끝나길 기도했었다. 

겨울이면 아빠와 인근 대학 캠퍼스로 가서 코가 빨개질 때까지 뒹굴거렸고 (엄마는 집에서 잠깐의 쉼을 가졌다.), 여름이면 입술이 새파랗게 될 때까지 첨벙거리며 물장구를 쳤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아도 아빠와 얼굴을 부비며, 또는 팔을 잡아 끌거나 와락 안겼던 기억은 도무지 없다.

나보다 아홉 살 어린 막내 동생은 성인이 되어서도 아빠를 앞에서도 껴안고 뒤에서도 껴안는다. 갈수록 불룩해지는 아빠의 배가 신기한지  아빠 배를 통통 두드리기도 하고 주물거리기도 한다. 어린 조카를 대하듯 아빠를 귀여워한다. 막내가 처음 그런 짓거리(?)를 하기 시작했을 때 아빠를 비롯한 우리 남매는 첫 번째로 눈이 휘둥그레졌고, 두 번째로 실소를 금치 못하다가 세 박자쯤 느리게 박장대소했다. 대체로 표현 방식이 서툰 구성원들 사이에서 이런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다니 여전히 신기할 따름이다. 표현이 풍부한 막내를 보는 것은 신기하고 웃기고 어딘가 흐뭇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느낀다. 시간이 흘러도 가까워지기 어려운 표현 방식이다. 

표현이 서툰 나와 표현이 서툰 아빠. 그러나 우리 사이에도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2009년 4월 19일의 이야기이다. 아빠와 나는 부둥켜 안고 울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빠는 나를 끌어 당겨 안았고, 울었고, 나는 낯선 품에서 울었다. 그때의 아빠를 떠올리자면 아주 뜨거운 무엇인가가 아빠에게서 흘러 내리는 것 같았고, 흘러 내리는 것들과 함께 아빠도 무너져 내렸던 것 같다. 구겨지던 아빠의 얼굴이 슬로우모션처럼 한 장면 한 장면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다. 절규하던 아빠의 목소리도. 나는 그것을 잊을 수 없다.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는 이모 차는 정적이 가득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는 조수석의 오빠 뒷통수만 쳐다보았다. 이모를 따라 처음 들어서는 장례식장은 온통 대리석 바닥이었고 공기가 서늘했다. 이곳이 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우리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인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린 우리 남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였다. 한 발 한 발 이모를 따라 계단을 내려갈수록 웅성웅성 사람들 소리가 들렸고 발걸음이 머뭇거졌다. 복도에 서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 아빠가 울고 있었다. 아빠가 우리를 발견했다. 검정색 옷을 입고 영문 모른 채 쭈볏거리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아빠의 울음은 오열로 바뀌었다. 살면서 어른의 오열을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것도 아빠의 오열을. 아빠는 휘청거리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곧바로 주저앉을 것만 같은 휘청거림으로 흐느끼며 오빠, 나, 아연이, 그리고 경은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를 끌어 안으며 말했다. 아니 절규했다. “아이고 미안하다 내 새끼들... 아빠가 미안하다 아빠가 미안해...” 아빠 품에 안긴 우리 넷이 아니었더라면 아빠는 정말로 무너져내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마는 엄마의 죽음은 허망했다.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위암 수술을 받았다. 위암3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평소 아픈 것을 티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특히 어린 자녀들에게는 더욱이 말이다. 하지만 위암 판정 후 점점 기력 없는 엄마를 보는 날이 많아졌다. 엄마는 아프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작은방 보일러 온도를 찜질방처럼 뜨겁게 올리고서 수시로 쓰러져 잠이 드는 엄마를 보면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수술을 받았고, 금세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회복기를 보내고 엄마는 활기를 찾았다. 엄마는 다시 노래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이처럼 들떠했다. 

엄마는 노래를 참 잘했다. 엄마는 청년 시절 KBS 합창단을 시작으로 쭉 성가대며 어머니 합창단, 중창단 등 노래 활동에 열심이었고, 꼭 솔로 소프라노를 도맡아 불렀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정색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 입고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엄마를 나는 무척 좋아했었다.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후로는 노래하는 엄마를 볼 수 없었는데 다시 엄마가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엄마는 연두색 악보 파일을 다시 꺼냈고 나에게 피아노 반주를 부탁했다. 전과 달리 쇳소리처럼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생기긴 했지만 더 깊고 풍성한 소리였다. 엄마는 행복해 했다. 피아노 치는 뒷통수에 들려오는 엄마의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피아노를 치는 게 귀찮지 않았다. 하루종일 건반을 두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가 건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가끔 건강이 좋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수술 후 1-2년간 엄마는 대체로 건강했다. 하지만 암세포는 서서히 치밀하게 엄마를 잠식해갔다. 엄마는 숨 쉬는 것을 힘겨워하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은 엄마의 오른팔이 고무장갑에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퉁퉁 붓기도 했다. 소파나 돌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쉬는 게 엄마의 일상이 되어 갔다. 가만히 기대어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웠는지 엄마는 아빠와 서울로 병원을 오고 가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의 치료 때문에 부모님이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집이 싫어졌다. 엄마 아빠 대신 양가 할머니들이 번갈아 자리하는 집, 이모들, 고모들 잔소리가 오가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주인이 바뀐 것 같았고 이 집의 외부인이 돼버린 것 같았다. 어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가며 우리를 돌봐주시는 것이었지만 죄송하게도 싫었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수험생인 오빠가 기숙사 생활 중이었기 때문에 언니인 내가 동생들을 살뜰히 돌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신경이 곤두선 나는 나밖에 몰랐다. 새벽 일찍 학교에 가서 밤늦게 들어왔다. 학교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 시절의 동생들을 궁금해 해본다. 아연이는, 경은이는 괜찮았을까? 

그 시절, 아빠는 어땠을까? 침상에서 시들어가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머리맡에서 매일 지켜봐야만 하는 아빠. 결국 엄마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가는 아빠의 시간은 어땠을까?

엄마 병이 재발하고 나서 대체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아빠가 이상했던 시절이 있었다. 게임 폐인 같았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아빠는 방문을 걸어 잠그거나 방 불을 끄고 안방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았고 엄마는 아빠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엄마에게 시한부 판정이 내려진 게 아닐까 싶다. 배우자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아빠의 마음을 내가 감히 헤아려 볼 수나 있을까? 아빠는 어두운 방으로 삶을 피해 도망가고 또 도망간 것이리라. 그런 아빠를 엄마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아빠는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끝까지 엄마와 함께 했다. 전주와 서울을 오가는 길 위에서, 다인실 병동 커튼 안에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네 명의 자녀와 남편을 남겨 두고 먼저 가야만 하는 엄마 그리고 아내를 살릴 수 없는, 엄마를 정말 많이 사랑하는 아빠. 둘은 무엇을 교감했을까.     


가끔 아빠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돌아누워 몸을 쪼그리고 자는 아빠의 뒷모습을 볼 때면 그렇다. 엄마 떠나고 몇 년간 아빠는 엄마 기일이 가까워지면 며칠이고 잠만 잤다. 휴가를 냈는지 회사에도 가지 않고 차가운 돌침대에 돌아누워 내리 잠만 잤다. 대자로 누워서도 아니고, 엎드려 코를 고는 것도 아니고, 옆으로 돌아누워 웅크린 채 말이다. 난 유독 엄마 꿈을 자주 꾸었는데 “나 꿈에 엄마 나왔다?” 이렇게 말하면 아빠는 항상 부러워했다. 그리고 뒷말을 덧붙였다. “엄마는 내 꿈에는 안 나와. 아빠가 밉나봐.” 

엄마의 기일이 가까워 질수록 아빠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계속 잠을 잤을 것이다. ‘여보, 내 꿈에도 나와줘. 여보, 보고 싶어.’ 

엄마 떠나고 십삼 년이 지났다. 나는 한 번도 아빠가 넓은 돌침대의 한가운데 누워서 주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빠는 침대의 반절, 딱 침대 오른편만 사용한다. 엄마가 비스듬히 기대 눕던 자리는 항상 비워둔 채로 비스듬히 돌아 누워 말이다.  

표현이 서툰 딸은 차마 아빠를 안아드리지 못하고 조용히 방문을 닫아줄 뿐이다. 엄마가 잠시 내려오면 좋겠다. 와서 새우잠 자는 아빠의 등 뒤를 가만히 안아주고 가면 좋겠다. 여보 수고 많다고, 충분히 분에 넘치도록 고맙다고, 우리 새끼들 짊어져줘서 너무 고맙다고, 보고 싶다고, 오늘 꿈속에서 만나자고 말이다. 엄마가 아빠를 가만히 안아주고 가면 좋겠다. 표현이 서툰 딸은 내 포옹을 오늘도 엄마에게 미룰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안아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