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숙 Jul 05. 2022

안아줘2

-엄마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엄마의 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출근길을 밝히는 장미 나무 두 그루를 지나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멜로디와 가사. 5월의 출근길은 줄곧 장미와 함께였고, 5월 아침이 온통 엄마였다. 둥실둥실 떠다니는 엄마의 노랫소리를 한주먹 움켜잡아 꿀꺽 삼킬 수 있다면… 아이처럼 맑게, 사뭇 진지하게 노래하는 엄마를 품에 꽈악 가둬 놓을 수 있다면….

 ‘엄마를 안아드린 적이 있었던가?’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심히 못나고 못나서 꿀밤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모습만 떠오른다. 꿀밤이 뭐람. 영화 인터스텔라 속 한 장면처럼 보이지 않는 결계를 사정없이 두드리며 “제발 정신 차려! 제발 엄마를 아프게 하지 마! 훗날의 너를 위해서라도 제발 그러지 마!”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억들만 가득이다.

 엄마와 나는 한 달에 한 번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먹으며 쇼핑도 하고, 시험 기간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면 몰래 단호박 피자 M사이즈를 시켜 먹기도 하는 절친이었지만, 그래서 그랬을까? 철없는 어린 나는, 그러니까 사랑을 사랑으로 알지 못하고 어딘가 뒤틀려 버린 어린 나는 내 절친 엄마를 쉽게 봤다. 인정하기 너무 아프지만, 그때의 나는 그랬다.


 나는 거짓말을 종종 하는 아이였다. 한바탕 혼쭐 난 후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 묻는 엄마의 질문에 “거짓말”이라고 울먹이며 대답한 후로도 나는 종종 거짓말을 했다.

 한번은 엄마가 불시에 일기장을 가져와 보라고 했다. 내일이 당장 피아노 대회인데 대회 전날 밤, 일기장 검사가 시작된 것이다. “일기 썼어?” “응~”으로 대답했던 거짓말이 최후를 맞이할 시간이 와버렸다. 일기장엔 정확하게 여덟 개의 공란이 있었고, 나는 여덟 대를 맞았다. 엄마는 아빠의 죽도에서 대나무 한 대를 뽑아서 그것으로 맴매를 했는데 보통은 손바닥을 때렸겠지만, 다음 날 나는 종아리가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했어야 했으므로 손바닥도, 종아리도 아닌 허벅지를 여덟 대 맞았다. 벽을 짚고서 말이다.

 어릴 때 오빠와 나는 ‘푸르넷’이라는 월간 학습지를 구독했다. 푸르넷의 특징은 매일 공부할 과목과 분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나란히 놓인 오빠와 내 책상 앞에는 각자의 푸르넷 시간표가 항상 붙어 있었고, 하교 후 간식 먹고 시간표를 따라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뿔싸?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던 어느 날, 초등학생 김은숙은 과감히 시간표를 위조했다. 그것도 매우 티가 나게 말이다. 정갈하게 인쇄된 시간표 위에 연필로 숫자만 바꿔 넣는, 곧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책상 앞에 떡하니 붙여 놓은 것이다. (그것 역시 맴매로 이어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은 하나 틀린 것이 없다. 나는 정말로 성적표를 위조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기말고사 평균 점수가 평소보다 10점가량 낮게 나왔고, 엄마에게 혼이 나는 게 무서웠던 것인지, 엄마 앞에서 자존심을 부리고 싶었던 것인지 모호한 나는 엄마가 없는 시간 집에 있는 복사 프린터를 통해 성적표를 여러 장 복사했다. 그리고 손톱보다 작은 숫자들을 오려 성적표 위에 덧붙였고, 그 조잡한 종이를 복사해 말끔한 위조 성적표를 만든 것이다. 성적과 등수를 꼼꼼히 비교한 엄마는 “이상하네?” 갸우뚱하긴 했지만 의심하지 않았다. 딸이 이토록 큰 사기를 칠 것이라고 예상하는 엄마는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일까. 나에게도 드디어 양심이라는 미덕이 자라기 시작한 것일까. 여름 방학을 보내는 동안, 혼자만 묻어둔 비밀이 나를 슬쩍슬쩍 불편하게 했고, 나는 아빠에게 이실직고했다. 아빠는 혼내지 않았다. 아주 큰 사건을 마주하면 비명도 안 나온다고 했던가. 적잖이 놀란 아빠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지금까지도 그 사건으로 내게 뭐라고 하신 적이 없다.

 엄마는 아빠를 통해 나의 거짓말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며칠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야 입이 만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하고, 엄마는 적잖은 충격을, 아니 아주 큰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내게서 괴물을 보았던 것일까. 그래서 어떤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청소기를 돌리던 엄마가 먼저 침묵을 갈랐다. 어떤 문장을, 어떤 단어를 말씀하셨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흥분한 엄마, 우는 엄마만 기억날 뿐이다.

 이토록 못된 딸이었다. 엄마를 갉아먹은 암세포 일부는 내가 키운 것인지도 모른다. 안아주기는커녕… 안아주기는 개뿔….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속이 참 좋았다. 품이 참 넓었다. 이토록 못된 딸도 안아주는 엄마였다. 손을 잡아준다거나 등을 쓰다듬어준다거나 안아주는 것은 엄마의 방식이 아니었다. 엄마는 쪽지로, 편지로, 문자로 마음을 전하는 것을 좋아했다. 딸이 자랄수록 엄마는 엄마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엄마와의 포옹 역시 기억에 많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엄마가 안아줬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네 살이었을까? 잠이 많은 어린이는 유치원에 가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다. 단잠이니 숙면이니 하는 잠에 대한 개념 따위 없이 그냥, 정말 그냥, 그냥 그냥 그냥! 잠이 좋은데 날 흔들어 깨우는 유치원이 너무 싫었다. 매일 아침이 전쟁이었다. 매일 아침 엄마는 날 번쩍 들어 유치원 봉고에 태웠다. 나를 번쩍 들고 4층 계단을 내려와야 했고, 유치원 봉고까지 달려야 했고, 종종 발버둥 치는 내 발에 턱을 강타당하기도 했다.

 앞에서 부끄럽고 낯뜨거워지는 못난 에피소드 몇 개를 이야기했는데 실은 그것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혼이 났다. 훈육할 땐 제대로, 각 잡고, 엄하게 혼을 내는 엄마는 등산이 취미인 할아버지가 산에 다녀오실 때마다 깎아 오신 오빠와 나 각각을 위한 회초리로 우리를 맴매했고, 맴매가 끝나면 다시 나긋하고 온화한 엄마로 돌아와 꼭 안아줬다. 무릎을 꿇고, 나와 눈을 맞추고 말이다. 엄마는 시험날 아침에도 안아줬다. 품에 안고 이렇게 속삭였다. “하나님, 우리 은숙이 열심히 한 만큼 좋은 결과 있게 해 주세요.” 조그만 어린이를 안아주는 엄마, 깡마른 엄마 품에 쏙 안긴 어린이. 사랑스럽기도, 낯 간지럽기도 하다.

 손가락에 꼽는 엄마와의 포옹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포옹의 순간이 있다. 그날 나는 예수 품에 기댄 요한처럼 엄마의 품에, 엄마의 어깨에 가만히 내 얼굴을 가져다 대 보았다. 수족냉증으로 항상 손발이 차가운 엄마는 그날 이상하리만치 뜨거웠다. 곧 터져버릴 사람처럼, 무언가를 끙끙 참아내고 있는 사람처럼. 엄마와의 마지막 날이었다.


 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향하는 , 우리   누구도 엄마와의 마지막 인사를 위해 병원에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의 어른들은 그랬다. 모두가 죽음에 서툴렀던 탓이겠지. 침대에 누운 엄마, 엄마를 둘러싼 우리. “어머니, 이제 남들 보지 마시고 어머니 하고 싶은  하시면서 행복하게 사셔요~” 엄마가 할머니에게 말했고, 할머니는 시종일관 눈물을 훔치셨다. 멀뚱멀뚱. 그런 장면들을 쳐다보면서 상황을 파악했다.

 엄마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엄마가 기대어 앉아있고, 그 앞에 내가 앉았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지만, 인간의 촉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일까. 나는 생전 하지도 않던 짓, 그러니까 엄마 손을 잡았고, 엄마에게 안겼다.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엄마에게 내 얼굴을 묻고는 가만히, 가만히, 그냥 가만히 있었다. 깡마르다 못해 바싹 야위어 버린 몸이지만 단단했고, 부드러웠고, 뜨거웠다. 가만히 기대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엄마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봐버렸다. 눈을 질끈 감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엄마를 봐버렸다. 어떻게 병실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보내고, 우릴 보내고 엄마는 울었을까? 그 높은 병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맑고 맑은 그 날의 풍경을 내다보며 엄마는 엉엉 울었을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던 엄마는, 한명 한명 우리 이름을 불러보고 안아보고 했던 엄마는 우릴 보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 오래오래 안아줄걸, 더 오래오래 안겨있을걸, 떼를 써서라도 병실을 지킬걸….

 ‘안아줘’라는 말은 어쩌면 은혜가 날 안아주기 전, 그러니까 내가 엄마에게 기대었던 순간, 뜨거운 엄마 품에 안겨있던 순간부터 나의 오랜 소원이고 갈망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아줘… 안아줘… 토닥이는 것도, 몸 부셔져라 껴안는 것도 얼마든지 얼마든지 허용할 테니 부디, 부디 날 안아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