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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숙 Jul 05. 2022

당신은 언제나 나를 보고 있지

-엄마

 ‘나는 엄마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 엄마를 보냈지만 보내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볼펜을 딸깍이다가 두 문장을 적었다. 가만히 들여다본다. 두 번째 문장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온전한 진실이 되려면 그 옆에 나란하게 놓여야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다.’     


 모든 장례 절차를 마친 다음 날이던가? 하교 후 집에 돌아온 나는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했다. 엄마의 옷장이며 화장대며 엄마의 공간에 자리한 엄마의 모든 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서, 정말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 당시 느낀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한 세계가 송두리째 사라졌다. 우리가 학교에 간 사이, 이모들이 와서 엄마의 유품을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어른들은 죽은 사람이 볼드모트라도 되는 듯 그 이름을 되도록 꺼내지 않으려 했고, 유품이 금서라도 되는 듯 눈앞에서 해치워 버렸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며 어른들은 다시 엄마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른들 나름대로 상실을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리움에 대처하는 각자의 방법을 터득하면서 다시 엄마를 조금씩 추억할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틀렸다. 엄마 유품을 모조리 처분한 것 말이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줬어야 했다. 엄마의 옷 냄새를 맡아볼 시간, 엄마를 기억할 물건을 하나씩 고를 수 있는 시간,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엄마를 추억할 수 있는 시간 말이다. 어른들은 구석구석 말끔하게 엄마의 흔적을 지웠고 집 안 이곳저곳을 뒤지며 난 겨우 두 가지 물건을 건질 수 있었다. 엄마의 운전면허증과 빨간 시계. 행여나 이것도 빼앗길까 봐 서랍에 넣어 두고 한 번씩 꺼내 보았다. 

 이런 나를 알았는지 엄마는 종종 나를 찾아왔다. 내 꿈에 말이다. 꿈에서 엄마는 다정한 큰언니이기도 했고, 토라진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엄마이기도 했다. 다양한 모습으로 엄마가 찾아왔다. 몇 가지를 꺼내 보자면 이렇다.      


1.

바야흐로 스무 살 무렵이었다. 대학 입학은 내게 어떤 전환점이 되어 주었다. 자퇴생이 학생이 되고, 외톨이가 친구들을 만나며 가랑비에 토양이 부드러워지듯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그것은 전적으로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고, 안정을 찾으며 나에게도 주변을 돌아볼 너그러운 마음이란 것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이는 내 동생들이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히키코모리로 방안에만 머물렀던 1년, 입시 준비하겠다고 기숙학원 생활을 했던 1년, 동생들 곁에 나는 없었다. 동생들에게 내 시선이 머물렀을 때 막내는 더이상 어린이가 아니었고, 가진이는 자기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좋은 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이 뒤늦게 부풀어 가기 시작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동생들이 자라는 동안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애잔함, 서글픔 같은 것들이 죄책감으로 마음속에 비구름을 만들었다. 미안해서 울었고, 방법을 몰라 울었고, 여전히 소리를 지르는 나를 보며 울었다. 이러한 마음들이 묵직하게 자리했고, 혼자 끙끙대던 나를 엄마가 눈치챈 것 같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지, 가끔 곁을 찾아오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엄마가 말이다.

 울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까(그땐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다. 아빠의 수많은 사랑으로 인해 우린 부족함 없기 때문이다), 내가 저 나이일 때는 엄마랑 지지고 볶기도, 알콩달콩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러지 못한 저 애들 안쓰러워서 어쩌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울었고, 그러다 잠들었다. 그리고 꿈을 꿨다.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내 방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현관, 우리 집 현관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엔 가진이와 애경이가 있었다. 두 아이는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어른의 품에 막내가 안겨있었고, 가진이는 막내를 뒤에서 껴안은 채로 두 아이가 누군가의 품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채로 세 사람은 하염없이 서 있었고, 동생들은 오래도록 가만히 날 바라보았다. 

 무슨 꿈이지? 잠에서 깬 후 두 가지 질문이 생겼다. 첫째,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였을까? 둘째, 날 바라보는 애들의 눈빛, 그건 분명 뭔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애들은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낸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았다.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하얗고 도톰한 그 파카로 알 수 있다. 새벽기도를 갈 때 엄마가 입었던 외투이다. 엄마가 동생들을 안아주러 왔구나. 두 번째 질문은 난제였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무표정으로 이렇게도 오래도록 쳐다보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지 않던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걸까? 대체 무슨 꿈이란 말인가? 

 며칠을 고민하다가 한 선배를 찾아갔고, 내 고민과 꿈에 대해 모조리 이야기했다. 한참을 듣고만 있던 선배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은숙아,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어머니가 동생들 안아주고 계셨다며. 어머니가 하늘에서도 동생들 잘 보살펴주고 계시네. 너가 하도 걱정하니까 어머니가 보여주셨나 보다. … 근데 은숙아, 너는? 나는 너도 같이 꼭 안겨있으면 좋겠는데?”

 선배의 말이 큰 힌트였다. 동생들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 우린 계속 여기 있었어. 여기 이렇게 줄곧 엄마랑 함께였어. … 언니는 왜 계속 거기에 있어? 언니 방에서 언제 나와?’ 

 큰딸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 이렇게 엄마가 동생들과 꼭 붙어 있다고, 너도 어서 여기 붙으라고. 그 말을 전해주기 위해 엄마가 꿈속에 찾아 왔구나.

 ‘그래, 나는 엄마가 아니지. 나도 엄마 딸이지. 난 엄마가 아니야.’      


2. 

 동생들과 불족발 집에 다녀왔다. 매운 닭발을 좋아하고, 족발을 좋아하는 동생들을 위한 최적의 메뉴였다. 객사 골목에 허름한 오래된 불족발 집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고, ‘그래 여기다’ 싶어서 결정했다. “족발 먹으러 가자!”

 장갑 낀 손으로 주먹밥을 말고, 야무지게 뜯는다. 동생들만큼 맛있게 먹는 사람을 못 봤다. 야무지게 한입 넣는 모습을 보는 언니의 흡족함과 뿌듯함은 ‘대체 이 먹부림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하는 걱정과 경이로움으로 끝이 난다. 동생들은 아주 맛깔나게, 아주 많이 먹는다. 

 배부르게 먹고, 만족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았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서 시시콜콜 농담을 주고받다가 잠들었다. 기분 좋은 낮잠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식탁에서 단란하게. 그래서 그렇게도 깊은 단잠을 잤던가? 엄마는 내가 동생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꼭 이렇게 꿈에 나타나곤 했다. 

 그냥 엄마와 둘이 식탁에 앉아있었던 것일 뿐인데, 앉아서 아무 말 없이 서로 귤을 까주었을 뿐인데 아주 달게, 달게 잤다. 꿈속은 고요했고, 깊은 안정감이 내려 앉아있었고, ‘아,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둘러싸고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포근했다. 이제는 꽤 아득해져서 정말로 내게 그런 엄마와의 시간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드는 순간을 꿈에서 만난 것이다. 현실이 아니어도 좋으니, 꿈속이라도 좋으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이 있고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3. 

원컨대 주께서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의 기도 중>     


 이 부분만 몇 번이나 불렀을까? 오래전 피아노를 치며 몇 번이고 불렀던 이 노래가 불현듯 왜 생각난 것인지 모르지만 눈을 감고 누워 몇 분 째 노래를 불렀다. 낮은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면 서울의 불안함도, 초조함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들릴 듯 말 듯 작게 노래를 부르는데 자는 줄로만 알았던 수지가 말했다. “포근해. 자장가 불러 주는 것 같아.”

 자장가. 자장가라… 자장가라 하니 머릿속에 한 장면이 펼쳐졌다. 한 여인이 아이를 등에 업고 자장가를 부르는 중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멀리서 빛나고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릴 적 많이 보던 풍경, 엄마와 막내다. 연보라색 민소매에 머리를 틀어 올린 엄마는 통통한 팔다리가 소시지처럼 대롱거리는 막내를 업고 노래하는 중이다.      


“애경이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애경이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가진이가 아기였을 때도 보았던 모습, 들었던 노래이다. 나와 오빠도 등에 없고 노래를 부르며 재워주셨겠지? 옛날 집에 살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평온하게 엄마 등에 볼을 기댄 막내와 엄마의 뒷모습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나지막이 부르던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며 생각했다. ‘뭐지…? 좋다.’

 그런데 진짜 신비로움이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야베스의 기도를 부르는데 엄마 옆으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나는 것 아닌가? 오빠다. 아직 엄마 어깨까지밖에 자라지 않은 어린 시절의 오빠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무테안경을 낀 어린이 오빠는 엄마 등 뒤로 대롱거리는 애경이의 팔다리가 예뻐 어쩔 줄 모르는 동생 바보다. 막내에게서 눈길 한 번 떼지 못하고 예뻐 죽는 중이다. 

 어린 오빠가 엄마 오른편에 나타나자 엄마 왼편으로는 가진이가 나타났다. 예쁜 얼굴과 명랑한 기운으로 어린이집을 휘어잡던 꼬마 가진이, 한 고집과 앙칼짐이 꽤 까탈스러웠던 까만 꼬마가 엄마 왼 발 치에 섰다. 단발머리의 까만 어린이인 나는 가만히 가진이 왼편에 섰고, 꼬마 가진이는 작은 손으로 내 검지를 그러쥔다. 

 필름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아빠가 나타났다. 내 왼편으로 아빠가 나타났다. 그런데 아빠만은 2022년 지금 모습 그대로였다. 다섯 사람이 20년 전 모습으로 나타난 것과 달리, 아빠는 2022년 현재, 그러니까 지난주 만났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익숙한 출근룩, 양복에 넥타이까지 갖춰 맨, 눈가 주름과 희끗희끗 흰 머리가 반짝이는 아빠가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아빠가 엄마를 바라보았다. 환히 웃는 얼굴로 함박웃음을 띈 채 아빠가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창밖을 보던 엄마가 아빠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아빠와 눈을 마주한 엄마가 웃고 있다. 이 미소, 아빠에게 좋음을 표현할 때 피던 엄마의 미소다. 말 한마디 오가지 않는 고요한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20년이나 늙어버린 아빠에게 20년 전의 엄마가 말하고 있었다. “여보 수고했어.”

 꿈이었을까. 비몽사몽 잠에 취했었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분명 깨어있었는데. 선명한 장면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코가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노래를 멈출 수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면 이 장면이 사라질 것 같아서, 필름이 끊길 것 같아서…. 야베스의 기도를 몇 번이나 불렀을까? 다른 멜로디가 입에서 흘러 나왔다.     


두려워 말라 너와 함께 함이니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됨이니

무서워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너는 마음에 염려치 말라

<두려워 말라>     


 자는 줄 알았던 수지가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다시 새근새근 잠들었고, 나는 평온함을 느끼며 ‘뭐지? 뭘까? 이 밤 도대체 뭘까…’ 생각했다. 그러다 왠지 알 것 같은, 명쾌해지는 맑음을 느꼈다. ‘나 지금 많이 무섭구나.’


 서울에 와서 가장 많이 느끼는 정서를 꼽으라면 무서움이라 하겠다. 이 무서움은 집을 알아보고, 집을 계약하고, 잔금을 치를 날이 다가올수록 선명하고 커지는 중이다. 이것은 출근 첫날 도무지 사람이 더는 들어갈 수 없는 꽉 막힌 버스 세 대를 보내고 지하철에 구겨 넣어지던 때에 느꼈던 공포와는 비교되지 않는 무서움이었다. 서울에 온 게 잘한 선택인지 자신 없어 지다가도, 선택의 옳고 그름은 지금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마음을 다잡는 의식을 매일 반복하며 나는 겁을 먹는 중이다. 잘살고 있는 것인지, 행복하게 사는 모습으로 아빠를 웃게 하고 싶은데, 꽤 볼품 있는 언니이고 싶은데 자신 없고,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것만 같은 날들…. 

 그런 나를 알고 있다는 듯 서울에서, 제주에서, 하늘에서 가족들이 모여 줬다. 

 “쑥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가 있어. 엄마가 지켜보고 있어.”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 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 밤 잠들지 못해 길게 깨어있는 나에게 엄마가 자장가를 불러 주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랑… 이런 마음으로 엄마는 나를 키웠구나. 이런 사랑… 이런 과분한 사랑으로 내가 자랐구나.’ 엄마의 노래는 엄마의 기도였다. 네 자녀를 향한 간절한 사랑, 자녀 양육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을 하늘로 올려 드리는, 엄마의 두려움을 덜어내는 동시에 사 남매를 향한 간절한 사랑의 기도.

 엄마의 노래가 나를 있게 했다. 노래에 담긴 엄마의 사랑은 너무나도 강한 것이어서 남은 우리를 하나로 이어준다. 홀로 있는 아빠를 지금껏 견디게 했다. 44년의 짧은 생, 모든 것을 우리 다섯에게 쏟고 간 엄마는 우리를 살리고 갔다. 여전히 우리를 살리고 있다. 언젠가 우리 여섯이 나란히 서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수고했어. 그동안 다들 정말 수고했어.” 엄마와 아빠가 주고받은 그 눈빛을, 우리 모두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엄마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 엄마를 보냈지만 보내지 않았다.


 엄마는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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