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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숙 Jul 06. 2022

커피 향이 나는 사람

반듯한 씨

1.

 정류장을 향하는 길,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뜨거운 핫팩을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하루 내 아랫배에 철썩 붙어 있던 녀석이다. 어젯밤부터 몸 상태가 심상치 않더라니, 생리통이 아침까지 계속돼서 약을 먹고 편의점에서 핫팩 하나를 사서 아랫배에 종일 올려두었다. 일회용 핫팩을 아랫배에 올려두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는 지난달 생리 때였다.

 반듯한 씨를 만나기로 한 토요일. 나는 전날 ‘자궁마저 얼어버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일산의 추위에 오들오들 떨었고, 본격 시작된 생리통 탓에 춥고 배가 아픈 토요일을 보내고 있었다. 약속을 미룰까 고민도 했지만, 매우 오랜만에 만나는 반듯한 씨이기도 하고, 무척이나 그가 보고 싶었기 때문에 진통제와 안에 껴입을 도톰한 카디건을 사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반듯한 씨, 나 너무 추워서 여기 쇼핑몰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퇴근하고 천천히 와요!” 

 퇴근한 반듯한 씨는 날 보자마자 적당히 데워진 핫팩을 건넸다. “옷을 춥게 입었네.” 그는 춥다는 나의 카톡에 퇴근하자마자 핫팩을 사서 데우면서 왔다고 했다. 철저한 원리원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인지라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반듯하고 모난 모서리의 정사각형일 것만 같은 반듯한 씨는 한 해 두 해 유해졌다. radius 값을 상당히 준 사각형이랄까?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 있나 싶을 수도 있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워낙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서 나는 그가 반듯한 네모는 아닐 것이라고 처음부터 확신했기 때문이다. 

 핫팩을 조물거리며 반듯한 씨가 예약해놓은 와인바로 향했다. 파스타와 닭고기 스테이크, 메시드 포테이토에 오렌지 와인을 곁들여 마셨고, 지글지글 요리하는 셰프들의 뒷모습을 배경 삼아 옛 추억부터 현재의 집 고민, 직장 고민, 돈 얘기 등을 널어놓았다. 반듯한 씨의 목소리는 사람을 안심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가게 이름만큼이나 조용한 저녁. 평화로운 저녁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일회용 핫팩을 배 위에 올려두고 잤다. 침대 위에 누워 배를 데우니 그제야 자궁도 긴장을 놓은 듯 뭉근하게 풀어진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핫팩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따듯했다.      


2. 

 “말금아 너에게는 교훈이란 게 없니?”

 제법 바람이 쌀쌀하던 3월의 어느 날, 반듯한 씨가 내게 건넨 첫인사다. 얼굴 한 번 안 쳐다보고 내 겉옷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이다. 이 사인은 지난번에도 춥게 입고 와서 오들오들 떨더니 이번에도 춥게 입고 나왔냐는 뜻으로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건네는 그만의 (애정이 담긴 ) 화법이었다. 멀리서 걸어오면서부터 표정이 의아하더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만나는 벗의 안색 따위는 살피지도 않고, 그러니까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훅 들어오는 첫마디가 “너에게는 교훈이란 게 없니?” 라니…. 북적거리는 홍대 한복판을 한참 깔깔거리며 걸었다. 나긋한 목소리로 사람을 후려 패는 반듯한 씨의 애정은 묘하게 사람을 당긴다.

 반듯한 씨가 홍대를 떠난다. 커피를 좋아하는 반듯한 씨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고 우직하게 8년을 지켰다. 그는 꼭 동화책에 나오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았다. 우리들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이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동안 반듯한 씨는 땅에 뿌리 내린 나무처럼 제 자리에 있었고, 언제든 좋은 것을 내줬다. 우리의 취향과 기분에 따라 소상히 메뉴를 추천해주는 것부터 정성껏 음료를 제조해 내어주는 어색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그의 서비스는 8년 간 한결 같았다. 그에게는 사람을 불러 당기는 뭔가가 있다. 전주에 살던 시절, 지옥철에 몸을 싣고 홍대를 향하는 이유엔 항상 반듯한 씨가 있었다.      

 합정에 직장을 구하고, 연남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나를 아주 안심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반듯한 씨의 존재였다. 사람을 미물로 만들어버리는 고층 빌딩숲과 어마 무시한 차량과 인파 사이에서 사람이 고플 때, 퇴근은 반갑지만 어쩐지 집에 가기는 싫을 때, 누군가를 마주함으로 긴장이 탁 풀어지고만 싶을 때, 아주 소량의 온정에 목을 축이고 싶을 때… 그럴 때면 언제든 반듯한 씨 얼굴이 떠올랐고, 걸음은 이미 반듯한 씨를 향하고 있었다. 8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말투로 “뭐 줄까? 밥은 먹었어?” “감자 스콘 구워줄까?” 안부를 묻는 반듯한 씨를 마주하고 있으면 팽팽했던 긴장감이 풍선 바람 빠지듯 푸슈슈, 편안해졌다. 반듯한 씨에게선 언제나 커피 향이 났다. 

 하루는 저녁 8시가 넘은 시각 반듯한 씨에게로 향했다. 작은 출판사에서 최저 시급의 급여를 받는 것만으로 돈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회사 자금 사정으로 급여 연체라는 것을 처음 겪은 나는 우왕좌왕 어쩔 줄 몰랐고, 급한 불이라도 꺼보자는 심정으로, 월세라도 벌어보자는 심정으로 퇴근 후 카페 알바 면접을 본 후 터덜터덜 그에게로 향했다. 반듯한 씨는 여전했다. “말도 없이 웬일이야? 밥은 먹었어? 샌드위치 만들어 줄까?” 그날도 그를 보니 푸슈슈-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사라진다. 곧 마감시간인데 빵이 하나 남았다며 반듯한 씨가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치아바타가 구워지는 동안 야채, 치즈, 닭가슴살을 두둑하게 모양 잡아가며 쌓아 올리며 묻는다. “치즈 두 장 넣어줄까?” 

 “나 사실 알바 면접 보고 오는 길이야.”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의 두 손이, 온몸이 멈췄다. 3초. 그러고 나서 반듯한 씨는 어떤 호들갑도 없이 여전히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축을 더 하고 싶어서?” 

 서울에 올라오고 한 차례 반듯한 씨와 이런 저런 돈 이야기를 한바탕 나누었던 터라 그는 내 사정과 불안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것과 별개로 어떤 일에도 호들갑이란 없는, 그러니까 평정심을 잃는다거나 상대를 요동하게 하는 법이란 없는 그의 성정 때문이었을까. 무엇 때문이었든 그의 한결같음이 또 한 번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3초의 일시정지가 있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지. 나는 네가 걱정 돼서. 몸 상할까봐.”라고 말해준 한결같음이 매우 고마웠다. 그것은 마치 내게 이렇게 들렸다.

 “알아. 알아. 괜찮아. 괜찮아. 별 일 아니야. 쉽지 않지만 별 일 아니야. 언제든 와.”

 퇴근길에 무턱대고 찾아갈 수 있는 곳, 발이 제멋대로 향하고 마음의 바람을 푸슈슈 빼내어 주던 커피향 같은 반듯한 씨가 이제 없다. 주말에 그가 없는 카페에 다녀왔는데 그가 없는 바는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 텅 빈 코트 위 벤치처럼 어딘가 텅 비어 보였다. 소량의 온정에 목을 축이고 싶을 때 이젠 어디로 가야할는지…. 반듯한 씨가 우리 집에 놀러올 때 장조림을 담아온 락앤락과 오크통 숙성을 거친 향긋한 더치커피를 담아온 분홍색 뚜껑 보틀, 두 개의 빈 용기에서 반듯한 씨를 떠올린다. 돌려주지 않길 잘했다. 매번 돌려준다는 것이 털렐레 까먹고 말았는데 빈 용기를 보며 온정 가득한 반듯한 씨를 떠올린다. 커피향이 나는 반듯한 씨의 나긋함에 안길 수 있었던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그럴 테지만, 종종 그를 떠올릴 것이다. 나를 안아주었던 한결같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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