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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에는 Jul 18. 2023

상간녀소송이 싱겁게 끝나버렸다.

정말 이게 끝인가요?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죠?

상간녀를 마주하는 가장 극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갑자기 막장 드라마의 배우가 되었다. 내가 주인공인지 바람난 두 남녀가 주인공인지 모르겠다.

아이 셋을 홀로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여자 A. A는 직장 동료 B가 유부남인 줄 알고 있지만 B의 다정함과 세심함에 끌린다. 어느덧 직장 생활에 큰 힘이 되어주는 B에게 위안과 위로를 받고 삶의 활력을 얻는다. 그렇게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A와 B의 관계는 깊어가지만 A는 B가 이혼하고 자신과 영원히 함께 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A는 B에게 헤어지자고 하고 B는 A에게 매달린다. 여기서 갑자기 B의 아내가 등장한다. 바로 나다! 본처의 등장신을 가장 극적으로 그리고 싶다. 밤마다 머릿속으로 본처의 등장씬과 이후 시나리오에 대해 고민했다.


'그녀에게 전화해서 '저 B 아내예요'라고 하면 그 여자가 뭐라고 반응할까? 전화번호를 모르는 척하고 A와 B가 함께 근무했던 직장의 상사한테 전화를 걸어 은연중에 불륜사실을 폭로할까? 커피숍으로 불러내서 드라마처럼 물을 끼얹을까? 집으로 찾아가서 동네 사람들과 애들 앞에서 쪽을 줄까? 그런데 그 여자가 딱 잡아떼면 어떡하지? 아... 그 여자 앞에 본처 역할로 등장하려면 꿀리지 않게 다이어트라도 급히 해야 하나? 불쌍하게 보이거나 내가 남편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서는 안 되지. 암암...


그런데 만나서 뭐라고 하지. 남편을 사랑했냐고 물어야 하나?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해야 하나? 아니 그걸 물어서 뭐 해. 그러면 만나서 뭐라고 하지. 너 죽고 싶냐고 해야 하나? 사과를 하라고 해야 하나? 내가 원하는 게 사과인가? 그건 아니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봐야 하나. 그걸 물어봐서 뭐 해.'


결국 상간녀 앞에 멋지게 등장하는 씬까지는 썼지만 그 뒤로는 쓸 수 없었다. 내가 극적으로 등장했을 때 상간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막상 생각해 보니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상간녀와의 만남은 '엄중 경고'를 할 때나 필요한 장면이다. 나는 남편을 두고 그녀와 싸울 의사가 없으니 그녀를 만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이혼을 철회할 것도 아니었고 남편을 아주 사랑했다고 해서 이혼해 줄 테니 앞으로 더 사랑하라고 축복해 줄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절절한 로맨스를 듣는다 한들 '아 저보다 찐사랑이었네요' 해줄 것도 아니었다. 


상간녀한테 듣고 싶은 말도 할 말도 없다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그녀와 남편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을 이 사회에서는 어떻게 다루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이었노라고 추억하며 소중한 것처럼 기억하지 못하게 심하게 오물을 뿌려줄 필요가 있다. 이것을 잘 해내야 나도 이 남자와의 결혼생활을 깔끔하게 접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힘이 날 것 같았다. 


정성 들여 소장을 직접 작성했다.


상간녀 A와의 외도는 이혼사유의 가장 큰 부분이긴 하였으나 전체는 아니었다. A와의 외도 외에도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더 있었고 A 외에 B와 C와 D 등도 있었다. 외도의 수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뿐 다 같은 외도였다. 그래서 A가 괘씸하면서도 남편에게 B, C, D 등 다른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남편과 이루어질 수 없는 비련의 사랑을 했다고 착각하고 있을 A가 가엽고 우습기도 했다. 나는 괘씸하지만 가엽고 우스운 A에게 법원을 통해 소장을 보내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법원이 너희를 심판하리라.


상간녀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를 하는 소송의 핵심 쟁점은 첫째, 상간녀가 남편이 유부남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둘째, 부정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부정행위의 정도, 외도의 지속기간, 혼인관계의 파탄여부 등에 따라 손해배상 위자료의 액수는 달라진다. 남편은 고맙게도 상간녀와 첫 관계를 맺은 그날의 카톡도 고이 소장하고 계셨고 둘이서 내 이름을 거론하여 마음이 불편하니 어쩌니 하며 대화하는 카톡도 있었다. 그녀의 집에 드나드는 블랙박스도 있었다. 나는 내 구구절절함과 분노를 담아서 아주 정성 들여 법원 소장을 직접 작성했다. 변호사 손에 이 글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직접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장 속 상간녀는 임신한 아내가 있는 남자를 꾀어 욕정을 채우고 본색을 숨긴 채 갓 출산한 남자의 아내에게 출산인사를 핑계 삼아 직접 찾아오기까지 한 뻔뻔하고 몰상식한 여자다. 소장 증빙자료에는 그녀와 남편이 첫날밤을 지낸 후 주고받은 낯 뜨거운 카톡도 들어있고 블랙박스에 찍힌 상간녀 본인의 얼굴도 있다.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은 그 소장을 법원과 그녀만 보게 되어서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


손해배상액은 인터넷으로 다른 사례들을 참고해서 3001만 원을 청구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니 3000만 원까지는 소액재판부가 담당하는데 집중해서 심리하기 어려우며 판결문에 판정이유가 기재되지 않을 수 있으니 판결문에 부정행위에 대한 판사의 판단 등이 기재되길 원한다면 3000만 원 초과금액으로 적어라 하여 3001만 원을 기재했다. 공적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찍을 수 있는 낙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3001만 원을 받으면 내 고통은 보상받는 것일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고작 3001만 원. 그녀는 3001만 원의 무게를 어떻게 느낄까. 그것이 크다고 생각할까 적다고 생각할까. 혹은 그것으로 본인이 죄를 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상간녀 소송이 싱겁게 끝나버렸다.


소장을 보내려면 상간녀의 집주소가 필요하다.

남편은 그녀의 집주소만은 말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잊어버렸다며 집주소를 대라는 내 추궁을 피해 갔다.

'네가 말 안 하면 내가 모를쏘냐' 블랙박스에 찍힌 화면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추정했다.

우편함이라도 뒤질 생각으로 갔으나 막상 도착하니 막막했다. 남편이 그녀를 만나러 올 때면 항상 차를 주차했던 곳에 나도 차를 주차했다. 남편 차 블랙박스 화면으로 보던 그녀의 아파트 출입구가 내 눈앞에 있다. 맥없이 차 안에서 한참을 앉아있다가 그냥 돌아왔다.


어쩔 수 없이 주소 없이 소장을 접수했고 법원은 보정명령을 내렸다.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기초로 각 통신사에 사실조회 요청을 했다. 그러던 중 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이혼 진행 중이신가요?' '네' '그러면 관할 법원이 민사법원이 아니라 가정법원입니다. 가정법원으로 사건이 이송됩니다' 변호사나 법무사 도움 없이 혼자 진행하다 보니 몰랐다. 가정법원에서 협의이혼신청확인서를 발급받아 법원에 보내니 사건이 가정법원으로 이송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간이 한 달 정도 맥없이 흘렀다.


전자소송 사이트에서 조회하니 드디어 법원에서 그녀에게 소장을 발송했다고 뜬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쯤 되면 송달완료가 떠야 하는데 왜 안 뜨지.

남편은 그녀에게 귀띔을 해줬을까. 아내가 소송할 거라고... 그래서 일부러 안 받는 건가?

일주일 정도 지나서 송달완료가 떴다. 소장을 보는 그녀의 얼굴이 궁금했다.


나는 그녀가 변호사를 선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가장 무난하고 안전한 방법이니까.

이제 진흙탕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오라!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인터넷에서 본 다양한 사례를 통해 나는 사전학습을 마쳤노라!


그런데 며칠 후 법원에서 위자료 3000만 원으로 화해권고결정을 내렸다. 아니 공방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화해권고결정을 내린다고? 그것도 3000만 원으로? 의아했다. 다음날 법원에서 전화가 왔다. 상간녀가 법원에 전화를 해서 위자료를 지급한다고 했고 그래서 3000만 원으로 화해권고결정이 난 것이라 했다. 법원 직원은 상간녀가 돈을 지급하려는데 계좌번호를 알아봐 달라고 하니 나에게 상간녀 쪽으로 계좌번호를 알려주라고 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끝난다고? '아... 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죠? 그러면 돈 받으면 끝나는 건가요?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죠?' 이 질문을 받은 법원 직원도 좀 당황스러운 듯 잠시 고민하더니 나에게 사건을 복기시켜 줬다. 나도 아는 사건의 맥락과 소송의 취지를 친절히 설명해 줬다.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몇 번 썼다 지웠다 했지만 결국 계좌번호만 찍어서 보냈다. 무슨 말을 하랴. 그녀도 나에게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법원은 그녀에게 3000만 원을 주라고 했지만 그녀는 내 소장 금액대로 3000만 원과 1만 원을 입금했다. 그렇게 상간녀 소송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은 우리의 협의이혼 재판일이었고 그렇게 6월 말 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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