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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에는 Jul 14. 2023

'밥이라도 잘 챙겨줘라'

바람피운 사위가 불쌍하다는 엄마

추궁과 항변


나는 마치 탐정이 된 듯 외도의 증거를 수집했다.

파면 팔수록 굵은 감자들이 자꾸 딸려 나와서 이것을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까지 걸린 시간. 15일

이혼을 결정하기까지 걸린 시간. 15일


외도 사실을 안 지 한 달 후 나는 남편에게 굵은 감자들로 똘똘 뭉친 폭탄을 '쾅'하고 던졌다.

그날 점심에 남편과 나는 직장 근처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커피를 잔씩 사서 자리에 앉았다.

남편은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굴다가 내가 상당 부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곧 상간녀와의 관계를 인정했다.

그 뒤 집에서, 사무실에서 몇 차례 추궁과 항변이 오고 갔다.

남편은 일주일은 안절부절못하며 항변하고 울고 매달리고 화를 내더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고 난 후에는 잠잠해졌다. 이혼으로 그칠 것이라고 생각해서 안심하는 듯했다. 내가 칼이라도 들고 방으로 들어올 줄 알았나 보다.


남편이 잠잠해지자 이혼 합의서를 작성했다.

자녀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 재산분할, 양육비, 위자료에 대한 협의를 빠르게 마쳤다.

남편에게 상간녀 소송을 할 것이니 개입하지 마라고 했고 남편은 별말이 없이 알겠다고 했다.

남편이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할까 봐 조금은 걱정했다. 정말 여자를 사랑했을까 봐.

3월 말 가정법원에 협의이혼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래도 밥이라도 잘 챙겨줘라'


5월 초 딸의 이혼소식을 접한 부모님은 수시로 전화하여 남편의 상태를 물었다.

그 괘씸한 녀석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무척 궁금하셨나 보다.

아빠는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도 직접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남편이 괘씸하다고 했고

엄마는 나에게 '그래도 밥이라도 잘 챙겨줘라'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심지어 엄마는 남편 이야기를 하면서 '불쌍하다'라고 했다. 그것도 두 번 세 번이나...

엄마는 정작 나에게는 '불쌍하다'라고 하지 않으면서 왜 남편한테 '불쌍하다'라고 할까

'도대체 뭐가 불쌍하다는 거야'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아니 그놈이 나쁘긴 한데 너희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잖아. 너희 어머니 생각하면 그놈이 그러면 안 되지'라고 했다.


엄마는 항상 시어머니를 걱정했다.

평소에도 '너희 시어머니는 뭐 먹고 사신대냐. 너네 남편이 돈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용돈은 드린다니?'라는 말을 수시로 했다.

단정한 모습에 항상 고운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는 계속 부잣집 맏며느리만 하고 사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넉넉했던 시댁은 시아버지 사업이 망하자 가세가 기울었고 남편이 23살 때 시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 혼자된 시어머니는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셨으나 몸이 약해서 특별한 경제활동도 못하셨고 그럭저럭 겨우겨우 사셨다. 엄마는 항상 그런 시어머니를 안쓰러워했다. 


그 뒤로 엄마는 종종 '시어머니랑은 통화했냐?'라고 물었다.

엄마는 나에게 시어머니와 통화해서 이혼사유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나는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여운 어머니에게까지 그런 고통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귀찮은 마음도 있었다. 어머니가 이혼사유를 자세히 알 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매번 전화할 때마다 시어머니와 통화를 했는지를 물었다. 


무슨 심리일까. 결혼이 가족과 가족의 만남이듯 이혼도 가족과 가족의 결별이라는 것일까? 그래서 저 쪽 가문에 귀책사유를 확실히 통보해라라는 요청인 걸까? 시어머니가 가여운 것은 가여운 것이고 또 정확히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나?


3개월의 숙려기간 '확실히 해야 한다.'


자녀가 있으면 3개월, 자녀가 없으면 1개월의 숙려기간을 거쳐야 한다.

남편은 숙려기간 동안 서서히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하기로 했다.


남편은 자녀 양육을 이유로 본인이 좀 더 집에 머무르기를 원했고 양육공백을 파고들었다.

2주에 한 번씩 면접교섭을 하기로 한 남편은 집 주변에 방을 알아볼 테니 저녁시간에 자기가 아이를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일이 많을 때에는 밤늦게까지 야근도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 제안이 솔깃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빠가 낫지 않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주저하고 있을 때 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

'확실히 해야 한다. 어영부영하면 안 돼'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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