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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은서의 시간』

은서의 시간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딸의 20년

by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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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은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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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의 운동회 Image 2025년 11월 4일 오후 05_47_00.png

[2005년, 은서가 7살]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날.

은서는 엄마 손을 꼭 잡고 운동장 입구에 서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아빠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 아빠 안 와?"

"아빠 오실 거야."

"진짜?"

"응. 조금만 기다려봐."

은서는 입구를 계속 쳐다봤다.

친구 민수 아빠가 지나갔다. 민수를 어깨에 태우고.

친구 지은이 아빠가 지나갔다. 지은이 손을 잡고 뛰면서.

"엄마..."

"응?"

"아빠... 안 오시는 거 아니야?"

"아니야. 오실 거야."

30분 후.

다영이 윤서의 휠체어를 밀고 운동장에 들어왔다.

은서가 뛰어갔다.

"아빠!"

윤서가 환하게 웃었다.

"별아! 미안해. 늦었지?"

"괜찮아!"

은서는 아빠 무릎에 앉았다. 가벼웠다. 은서는 7살이지만, 아빠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아빠, 나 오늘 달리기 해!"

"그래? 우리 별이 1등 하겠네?"

"응!"

그때였다.

"야, 쟤 아빠 봐."

뒤에서 민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서의 몸이 굳었다.

"휠체어 타고 있어."

"진짜네. 왜 저래?"

"아파서 그런가?"

"불쌍하다..."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은서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 아빠가 아파서 그래."

은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파? 왜 학교 와? 집에 있지."

"우리 아빠는 병원 환자 아니야."

"근데 휠체어 타잖아."

"..."

은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윤서가 은서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별아,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달리기 시작.

은서는 있는 힘껏 뛰었다.

아빠가 보고 있으니까.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아빠는 아파도, 나는 잘할 수 있다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3등.

다영이 손뼉 쳤다.

"은서야! 잘했어! 정말 잘했어!"

윤서도 손뼉 쳤다. 손에 힘이 없어서 소리가 작았지만.

"우리 별이 최고야!"

하지만 은서는 웃을 수 없었다.

민수가 1등을 했다. 민수 아빠가 민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와! 우리 아들 최고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다가, 아빠를 봤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빠.

자신을 들어 올릴 수 없는 아빠.

은서의 눈에서 눈물이 났다.

달리기 3등 한 은수의 마음 Image 2025년 11월 4일 오후 05_15_43.png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서는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작게 물었다.

"엄마."

"응?"

"왜 우리 아빠는... 다른 아빠랑 달라?"

다영의 걸음이 멈췄다.

휠체어도 멈췄다.

"... 다르지 않아."

"근데 휠체어 타잖아. 민수 아빠는 안 타는데."

"그건 아빠가 조금 불편한 거지, 다른 게 아니야."

은서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친구들이 자꾸 쳐다봐."

"..."

"부끄러워. 나... 아빠가 부끄러워."

다영은 무릎을 꿇고 은서와 눈높이를 맞췄다.

"은서야."

"..."

"아빠는 휠체어를 타. 맞아."

"응."

"근데 그게 아빠의 전부는 아니야."

다영이 은서의 손을 잡았다.

"아빠는 별이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야. 별이 이야기 들어주는 걸 제일 좋아하고, 별이가 웃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진짜?"

"응. 아빠는 아빠야. 휠체어는 그냥... 아빠가 걷는 방법일 뿐이야. 민수 아빠는 두 다리로 걷고, 우리 아빠는 바퀴로 걷는 거야."

다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살 은서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어리고 여린 은수의 마음- Image 2025년 11월 4일 오후 05_00_31.png

하지만 그날 밤.

은서는 방에서 울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 안 나게.

"왜 우리 아빠는 다를까... 왜..."

윤서는 방문 밖 복도에 있었다.

은서의 작은 울음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윤서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내 딸이 나 때문에...

내 딸이 나를 부끄러워 운다.

다영이 복도로 나와 윤서의 손을 잡았다.

윤서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괜찮아요. 은서는 알게 될 거예요."

다영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언제요?"

"커가면서. 천천히. 우리 딸은 착한 아이니까."

"하지만... 부끄럽다고 했어요. 내가... 내 딸한테 부끄러운 아빠라니..."

"그게 아니에요." 다영이 윤서의 뺨에 손을 얹었다. "은서는 아직 어려서 그래요. 7살이에요. 이해 못 하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우리가 계속 사랑해 주면 돼요. 은서가 알 때까지."


[2015년, 은서가 17살]

고등학교 2학년.

은서는 친구들과 카페에 있었다.

"은서야, 너희 집 어디야?"

"... 왜?"

친구 수진이가 물었다.

"놀러 가고 싶어서. 너희 집에서 과제 같이 하면 되잖아."

"우리 집은 안 돼."

"왜? 부모님이 안 좋아하셔?"

거짓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 응. 그래."

"에이, 아쉽다."

은서는 고개를 숙였다.

거짓말이었다.

은서는 친구들을 집에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빠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때 한 번, 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친구가 아빠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다음 날, 반 아이들이 다 알았다.

"은서 아빠 휠체어 타"

"진짜? 불쌍하다..."

"은서 집에 놀러 가면 불편할 것 같아."

그 이후로, 은서는 친구들을 집에 절대 데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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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은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집이 조용했다.

엄마는 장 보러 나간 것 같았다.

"아빠?"

대답이 없었다.

은서는 가방을 내려놓고 거실로 갔다.

그리고 멈췄다.

윤서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빠!"

은서가 달려갔다.

"왜 이래요?! 괜찮으세요?!"

윤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 미안. 휠체어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졌어."

"왜 혼자 하려고 그래요! 엄마 기다리면 되잖아요!"

"엄마 오기 전에 일어나려고 했는데... 힘이 안 들어가네."

윤서의 목소리가 작았다.

은서는 아빠를 부축했다.

17살 소녀가 50대 남자를 일으켰다.

힘들었다.

아빠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니, 은서가 생각보다 약했다.

"으... 윽..."

은서가 힘을 주며 아빠를 휠체어에 앉혔다.

손이 떨렸다.

등에 땀이 났다.

"은서야, 미안해. 엄마 오기 전에 일어나려고..."

"됐어요."

은서의 목소리가 차갑게 나왔다.

"조심하세요. 다음부터는."

은서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쿵.

문 소리가 컸다.

은서는 침대에 쓰러졌다.

천장을 봤다.

왜.

왜 우리 아빠는 이래야 하는 걸까.

눈물이 났다.

화가 났다.

누구한테 인지 모르겠지만.

아빠한테? 아니야.

세상한테? 모르겠어.

나한테? 그런가?

휴대폰을 봤다.

친구들 단톡방.

[수진] 은서야 내일 뭐 해?

[민지] 우리 집 와~ 영화 보자

[수진] 오! 좋아! 은서도 와!

은서는 답장을 쓰려다가 멈췄다.

'나도 친구들 집에 초대하고 싶어.'

'나도 우리 집에서 같이 놀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은서는 휴대폰을 던졌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나쁜 딸.

나는 정말 나쁜 딸이야.


[2023년, 은서가 25살]

은서의 독립선언Image 2025년 11월 4일 오후 06_07_56.png

대학 졸업.

은서는 취업했다.

회사는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였다.

"은서야, 회사 근처에 방 얻을 거야?"

다영이 저녁 먹으며 물었다.

"... 응."

"그래. 출퇴근 힘들겠다."

"응."

윤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밥을 먹고 있었다.

손이 떨려서 숟가락을 자꾸 떨어뜨렸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2주 후.

은서는 원룸을 얻었다.

회사에서 10분 거리.

이사 가는 날.

다영이 짐을 챙겨주었다.

"은서야, 이것도 가져갈래?"

"아니, 괜찮아."

"이건?"

"그것도 놔둬."

은서는 필요한 것만 챙겼다.

빨리 나가고 싶었다.

"은서야."

다영이 은서를 불렀다.

"응?"

"... 잘 지내."

"응."

다영의 눈이 붉어졌다.

"주말에 올래?"

"... 바쁘면 못 갈 수도 있어."

"그래. 알았어."

다영은 웃었다.

하지만 은서는 알았다.

엄마가 슬퍼한다는 걸.

그리고 은서도 슬펐다.

하지만 가야 했다.

윤서가 휠체어를 타고 현관까지 나왔다.

"은서야."

"... 네."

"회사 생활 힘들면 언제든 집에 와."

"네."

"밥 잘 챙겨 먹고."

"네."

윤서가 또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 잘 지내."

"네."

은서는 짐을 들고나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울 것 같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은서는 그제야 울음을 터뜨렸다.

나쁜 딸.

나는 정말 나쁜 딸이야.

엄마 아빠를 버리고 도망치는 나쁜 딸.

하지만...

하지만 나도 살고 싶어.

아빠 걱정 안 하면서.

친구들 눈치 안 보면서.

그냥... 평범하게.


[2025년, 은서가 27살]

2년이 지났다.

은서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갔다.

아니, 한 번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두 달에 한 번이 됐고, 세 달에 한 번이 됐다.

매번 핑계가 있었다.

회사 야근.

친구 약속.

피곤해서.

모두 거짓말이었다.

어느 날 저녁.

은서는 혼자 원룸에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버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버지."

"응?"

"...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그래?"

"그냥. 말하고 싶어서요."

화면 속 아버지가 웃었다.

"나도 사랑한다."

은서의 손이 멈췄다.

리모컨이 손에서 떨어졌다.

나는 언제 아빠한테 '사랑해'라고 말했지?

기억을 더듬었다.

초등학교? 기억 안 나.

중학교? 없었던 것 같아.

고등학교? 확실히 안 했어.

한 번도 안 했다.

27년 동안 단 한 번도.

은서는 휴대폰을 들었다.

엄마한테서 카톡이 와 있었다.

[엄마] 은서야, 밥 먹었어?

2시간 전 메시지였다.

은서는 답장을 쳤다.

[은서] 응. 엄마도?

[엄마] 응. 아빠랑 먹었어.

[엄마] 오늘 아빠가 너 보고 싶대.

[은서]...

[엄마] 은서야, 이번 주말에 집에 올래?

은서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번 주말.

토요일 오후에 약속이 있었다.

친구 생일 파티.

거짓말을 치려고 했다.

[은서] 바빠서 못 갈 것 같아.

타이핑하다가, 지웠다.

은서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거짓말이었다.

바쁘지 않았다.

친구 생일 파티는 다음에 가도 됐다.

그냥... 가기 싫었다.

아빠 보기가 힘들었다.

왜?

은서는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왜 나는 아빠가 부끄러운 걸까?

왜 나는 아빠를 보면 불편한 걸까?

왜 나는 집에 가기 싫은 걸까?

왜 나는 이렇게 나쁜 딸인 걸까?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 그래. 알았어. 일 많이 하지 말고 건강해.

[엄마] 사랑해, 우리 은서.

은서는 휴대폰을 꼭 쥐었다.

눈물이 났다.

엄마, 미안해.

아빠, 미안해.

나 정말 나쁜 딸이에요.

은서의 성장- Image 2025년 11월 4일 오후 06_13_1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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