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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길을 만들었는가 EP.1 — 출발

"왜 걷기 시작했는가"

by 쉼표


프롤로그

"우리는 왜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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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바람이 멈춘 길. 이정표 하나. 글자가 지워져 있다.

사람 둘. 발자국 없는 흙길.

Simp와 Road는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조용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다.


Scene 1 — 첫 발걸음

Road: 걷자.

Simp: 어디로?

Road: 저쪽.

Simp: 저쪽이… 어디야?

Road는 지워진 이정표를 가리킨다.

Simp는 그 빈 표면을 바라본다. 지워진 자리. 흉터 같다.

Simp: 당신 이름… 뭐였더라.

Road: Road.

Simp: 그래. 길. (한 박자 멈춤) 길인데… 길을 몰라?

Road는 대답하지 않는다. 발끝을 흙에 누른다. 흙이 꺼진다.

둘은 걷기 시작한다.


Scene 2 — 반복의 시작

몇 걸음 지나지 않아, Simp가 멈춘다.

Simp: … 여기, 어제도 왔었어.

Road: 맞아.

Simp: 그저께도.

Road: 맞아.

Simp: 근데… 도착 못했지?

Road: … 맞아.

침묵. 길은 같은 모양이다.

Simp: 오늘은… 도착할까?

Road: 모르겠어.

Simp: 그래도… 가야 해?

Road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멈추면, 뭔가 일어날 것처럼.


Scene 3 — 기억의 공백

Simp: 우리… 왜 걷고 있어?

Road: 글쎄.

Simp: 언제부터 걸었는지도…

Road: 기억 안 나.

Simp: 누가 가자고 했어?

Road는 대답하지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 발자국 하나 없다. 아무도 지나간 적 없는 길.

Road: … 기억 안 나.

둘은 또 지워진 이정표 앞에 서 있다. 아까 그 자리와 똑같다. 아니, 아까 그 자리인지도 모른다.

Simp: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을까?

Road: 모르겠어.

Simp: 화살표는… 어디를 가리켰을까?

Road는 입술을 닫은 채, 어둠을 바라본다.


Scene 4 — 첫 번째 균열

Simp: (주저앉으며) 잠깐… 쉬자.

Road: 조금만 더 가자.

Simp: 왜? 여기와 저쪽이… 뭐가 다른데?

Road는 침묵 끝에 말한다.

Road: … 멈추면 안 될 것 같아서.

Simp는 가볍게 웃는다.

Simp: 내 이름이 뭔데.

Road: Simp.

Simp: 멈춘다는 뜻이야.

Road: 알아.

Simp: 근데… 계속 걷고 있잖아. 이상하지 않아?

Road는 아무 말 없다. 어쩌면 인정하는 침묵.

어둠이 스며든다. 빛없는 하늘이 길 위로 내려앉는다.

Simp: 어두워지네.

Road: 맞아.

Simp: 오늘도… 못 가겠네.

Road: … 그런가 봐.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다. 길은 같은 표정이다.

둘은 그 자리에 앉는다.

Simp: 그래도… 내일 걸을 거야?

Road: 응.

Simp: 왜?

Road는 아주 조용히 말한다.

Road: … 멈추면, 우리가 잃어버린 게 뭔지… 잊어버릴까 봐.

Simp가 Road를 바라본다. 처음 듣는 말. 처음 생긴 균열.

Simp: … 우리, 뭘 잃어버렸는데?

Road는 대답하지 못한다. 작은 숨만 새어 나온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는다.

[EP.1 끝]


시리즈 보기

→ 다음 에피소드 EP.2 반복: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작가의 말

「길 위의 대화」에서 이어집니다.

당신은 왜 걷고 있습니까?

아니, 멈춰도 괜찮다.

EP.2 「반복」 12월 3일 (수) 오전 10시에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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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2 「반복」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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