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가"
프롤로그
그 목소리는 밝고, 친절하고, 그런데 차갑다. … 가자. 누구였을까.
무대
해가 뜬 듯하지만 온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림자는 길어졌다가 다시 짧아진다. 시간이 연기처럼 움직인다.
둘은 걷고 있다. 아니, 걷고 있었던 것 같다.
Scene 1 — 기억의 첫 흔들림
Simp: 오늘… 언제부터 걷고 있었지?
Road: 모르겠어.
Simp: 시작할 때 뭐 말했던 것 같은데.
Road: … 나도.
Simp는 멈춰 선다. Road도 자연스럽게 멈춘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본다. 눈빛 속에 뭔가 빠져 있다.
Simp: 우리… 어제 뭐 하고 있었지?
Road: …
Simp: 기억나?
Road: … 조금?
Simp는 Road를 똑바로 바라본다.
Simp: 조금이 아니라… 아예 기억 안 나는 표정이야.
Road: (낮게) 기억하려고 하면… 흐려져.
Scene 2 — 기억을 되짚을수록 더 지워지는 세계
Simp는 깊게 숨을 들이쉰다. 이정표 방향을 본다. EP.1에서 본 그 자리와 똑같다.
Simp: 우리… 누가 걷자고 했는지도 기억 안 나지?
Road: 응.
Simp: 처음에 우리가 어디 있었는지도.
Road: 응.
바람도, 먼지도 없다. 소리도 없다. 이정표의 글씨가 희미하게 번져 보인다. 아까보다 더.
Simp: (혼잣말처럼) 아예 처음부터 기억이 없었던 걸까.
Road: …그럼 난 왜 계속 걷고 있었지?
둘은 동시에 침묵에 빠진다. 저 멀리, 길의 끝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기억이 비어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무게감 있게 느껴진다.
둘은 다시 걷는다. 말없이. 발소리만 일정하게 반복된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을 세는 건 의미가 없다. 이 길에서는.
Scene 3 — 기억의 파편이 나타난 순간
갑자기— Simp의 표정이 굳는다.
Road: 왜 그래?
Simp: 방금… 뭔가 떠올랐어.
Road: 뭐?
Simp는 눈을 감는다. 귓가에서 아주 작게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스친다.
… 가자.
낯선 목소리. 그러나 아주 친숙하다. 그러나 Road의 목소리는 아니다.
Simp: 누가… 나한테 '가자'고 했어.
Road: 나 아니야.
Simp: 알아. 그래서 이상해.
Road: 그 목소리… 어떤 목소리였어?
Simp: 밝아.
Road: …
Simp: 친절해.
Road: …
Simp: 근데… 차가워.
Simp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떨리지 않는다. 그런데 손바닥이 서늘하다. 방금 그 목소리가 스쳐 간 자리처럼.
Road는 갑자기 눈을 피한다. 그 반응이 너무 빠르다.
Simp는 그걸 본다.
그 순간, 발밑의 길이 아주 미세하게 떨린다. 둘 다 느낀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Scene 4 — EP.4로 이어지는 균열
Simp: 너… 알고 있었어?
Road: 아니.
Simp: 근데 왜 지금 얼굴이 달라졌어?
Road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다 입술이 떨린다.
Road: … 기억이 떠오른 거면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몰라서.
Simp: 왜?
Road: 이 길은… 기억을 싫어해.
Simp: 길이?
Road: … 아니, 이 세계가.
하늘이 아주 천천히 어두워진다. 해가 지는 게 아니다. 그냥, 빛이 줄어든다.
둘은 잠시 서로를 바라본다.
그리고, Simp는 아주 조용히 묻는다.
Simp: 우리… 기억하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Road는 대답하지 못한다. 대신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흘린다.
Road: … 기억하면, 이 길이 바뀌어.
Simp는 숨을 삼킨다.
저 멀리, 이정표 하나가 천천히 기울어진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Simp는 그 이정표를 바라본다. 그리고 아주 낮게 중얼거린다.
Simp: … 그 목소리, 다시 들릴까.
Road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어디선가 시간이 스르륵 미끄러져 가는 듯한 얕은 감각이 스친다.
[EP.3 끝]
시리즈 보기
← 이전 에피소드 EP.1 출발: "왜 걷기 시작했는가" EP.2 반복: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 다음 에피소드 EP.4 시간: "이 세계의 시간은 왜 멈춘 것처럼 흐르는가"
작가의 말
기억은 이상합니다.
붙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잊으려 하면 불쑥 떠오릅니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인지, 사실 아무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에피소드를 쓰면서 자꾸 한 가지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기억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Road와 Simp는 걸어온 길의 흔적은 느끼지만 출발점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과거는 안갯속에 있고, 현재는 발밑의 길뿐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매일 걷고 있지만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잊어버린 사람들. 분명 누군가 '가자'고 했을 텐데 그 목소리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사람들.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EP.4에서는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기억이 흔들리면, 시간도 흔들립니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EP.4 「시간」 12월 8일 (월) 오전 10시에 찾아뵙겠습니다.
#누가이길을만들었는가 #부조리극 #철학에세이 #기억 #존재 #자아 #걷기 #여정 #대화극 #미니멀리즘 #사색 #쉼표의서재 #연재소설 #단막극 #실존 #시간 #흔적 #질문 #멈춤에서 시작하는글쓰기
— EP.4 「시간」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