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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길을 만들었는가 EP.4 —시간

"이 세계의 시간은 왜 멈춘 것처럼 흐르는가"

by 쉼표


프롤로그

낮이다. 어제도 낮이었다. 그제도. 해는 떠 있지만 지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시간이 '있는 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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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하늘에 해가 있다. 그러나 그 위치가 어제와 같다. 아니, 아까와도 같다.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짧아진다. 규칙 없이. 이유 없이. 마치 누군가가 조명을 만지작거리듯.

둘은 걷고 있다. 아니, 걷고 있다고 '기억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Scene 1 — 시간의 흐름이 어긋나는 순간

Simp: … 잠깐.

Road: 왜?

Simp는 하늘을 바라본다. 구름이 없다. 빛도 없다. 그러나 밝다.

Simp: 지금… 몇 시 같아 보여?

Road: 글쎄. 낮 같은데…

Simp: 아까도 낮이었어.

Road: 맞아.

Simp: 어제도 낮 같았어.

Road: 맞아.

Simp: 그제도.

Road: …

Simp가 Road를 바라본다. Road는 눈을 피한다. 숨소리가 아주 얕게 흔들린다.

Simp: 밤이… 온 적 있어?

Road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Scene 2 — 시간의 모순이 드러나는 길

길가에 서 있는 그림자가 길다— 그리고 아무 이유 없이 짧아진다.

그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다. 누군가가 조명을 조절하는 것 같다.

Simp: … 그림자 봤어?

Road: 응.

Simp: 저런 속도로 바뀌는 거… 말이 돼?

Road: …

Simp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Simp: Road, 시간… 흐르고 있어?

Road는 정면을 바라보지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Road: …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흐르는 척하는 것 같기도 하고.


Scene 3 — 세계가 '연출된 것 같다'는 첫 자각

Simp가 갑자기 멈춘다.

Road: 왜?

Simp: 방금…

Road: …

Simp: 바람이 불려고 했어.

Road가 눈을 크게 뜬다.

Road: …"불려고 했다"라고?

Simp: 응. 근데 안 불었어.

Road: 어떤 느낌이었는데?

Simp: 누군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지 않은 느낌.

Road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은 아무 표정이 없다.

Simp: Road.

Road: …

Simp: 이 길… 누군가가 연기처럼 만들고 있는 거 아닐까?

Road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처음으로, Road의 목소리에 균열이 섞인다.

Road: 그러니까… 시간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거라고?

Simp: 아니. 시간이… 우리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Road가 멈춘다.

Road: …그 말, 하지 마.

Simp: 왜?

Road: 그 말…

Road의 목소리가 거의 속삭임이 된다.

Road: 시간에 들릴지도 몰라.


Scene 4 — EP.5 '멈춤'으로 이어지는 진동

Simp: 시간에… 들린다고?

Road: 응.

Simp: 시간은 소리를 듣는 존재야?

Road: … 정확히는 모르겠어.

Simp: 그럼 왜 조심해?

Road: (작게) … 조심하라고 했어.

Simp는 멈춘다.

Simp: 누가?

Road: …

Road는 대답하지 못한다. 대신 아주 작은 속삭임처럼 말한다.

Road: … 시간은, 우리가 멈추면 더 이상 연기처럼 흐르지 않아.

Simp: 그럼… 우리가 멈추면 이 세계는 어떻게 돼?

Road는 눈을 감는다.

Road: (속삭임) … 멈추면, '길'이 시간을 잃어.

Simp: 그게… 무슨 뜻이야?

Road: 조금만 더 걸으면… 알게 될 거야.

둘은 다시 걷기 시작한다.

그 순간, 아까 불려다 멈춘 바람이 — 아주 짧게, 한 번 스친다. Simp는 뒤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길보다 시간이 먼저 먼지처럼 부서지는 느낌이 든다.

Simp는 아주 낮게 중얼거린다.

Simp: … 시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

Road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 더 빠르게 걷는다.

[EP.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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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출발: "왜 걷기 시작했는가"

EP.2 반복: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EP.3 기억: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가"

→ 다음 에피소드 EP.5 멈춤: "멈추면 무엇이 드러나는가" (coming soon)


작가의 말

시간은 흐른다고 믿습니다. 아침이 오고, 낮이 지나고, 밤이 옵니다. 우리는 그 흐름 위에 삶을 얹고, 그 흐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흐르는 척'하고 있다면? 만약, 시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면?

Road와 Simp는 이제 시간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의심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EP.5에서는 '멈춤'을 이야기합니다. 걷기를 멈추면, 무엇이 드러날까요.

당신은 오늘,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확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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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5 '멈춤'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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