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면 왜 안 되는가"
프롤로그
걷는 건 쉽다. 발을 떼면 된다. 멈추는 건 어렵다. 발을 떼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왜, 멈추면 안 되는 걸까. 왜, 이 길은 멈춤을 두려워하는 걸까.
무대
빛은 낮처럼 퍼져 있지만 온도는 아침 같고, 그림자는 오후처럼 떨어진다. 길은 여전히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제는 "펼쳐져 있을 뿐"이 아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Simp와 Road는 걷고 있다. 그러나 Simp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다.
Scene 1 — Simp의 첫 '의도적' 멈춤
Simp: 잠깐.
Road: … 또 왜 그래.
Simp는 Road의 어깨를 붙잡는다.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이다. 이건 '의도된' 행동이다.
Simp: 나… 오늘은 멈춰보고 싶어.
Road: 안 돼.
Simp: 이유를 말해.
Road: … 말할 수 없어.
Simp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Simp: 그럼 난… 멈춰볼 거야.
Road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 떨림이— EP.1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두려움으로 보이는 순간.
Simp는 천천히, 천천히, 발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멈춘다.
Scene 2 — 세계가 Simp의 멈춤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길의 색이 아주 조금, 아주 조금, 희미하게 변한다.
바람이 불지 않지만 공기가 "울컥" 하고 들어앉는 느낌. 빛이 흔들리지 않지만 그림자가 미끄러져 내려간다. EP.4에서 줄어들던 빛이, 이번엔 아예 숨을 멈춘 것 같다.
Road는 한 걸음 뒤에 서 있다.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Simp: (작게) 느껴졌어?
Road: …응.
Simp: 나… 아무것도 안 했어.
Road: 그래서 그래.
Simp의 손끝이 떨린다.
Simp: 여기… 무서워졌어.
Road: 멈췄으니까.
Scene 3 — 길이 시간을 잃는 순간
길의 표면이 숨을 죽인다.
빛이 잘리지 않는다. 그림자가 자라지 않는다. 공기가 움직이지 않는다. 발밑의 흙이 미세하게 숨을 참는 듯 고요하다.
모든 것이 잠깐, 멈춘다.
그 순간— Simp는 뭔가를 본다.
아주 짧은 기억의 파편. 누군가의 뒤통수. 누군가의 발. 누군가의 목소리.
… 멈춰도 돼.
그 목소리. EP.3에서 들었던 "가자"와 같은 목소리다. 밝고, 친절하고, 그런데 차갑다.
Simp는 몸을 움찔한다.
Simp: 방금… 누가 나한테…
Road: 기억하지 마!
Road가 갑자기 팔을 잡는다. 강하게. Simp가 놀라서 돌아본다.
Simp: 왜 이렇게…
Road: 제발.
Road: 그 기억… 따라가면 안 돼.
Simp는 한동안 말이 없다. Road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느낀다.
Scene 4 — EP.6 '길의 기원'으로 이어지는 균열
Simp는 천천히 다시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길은 여전히 '멈춘 세계의 잔향'을 품고 있다.
Road는 Simp의 바로 옆을 걷는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까이.
Simp: Road.
Road: …
Simp: 이 길… 지금 막… 우리 때문에 멈춘 거 맞지?
Road는 대답하지 못한다.
대신, 처음으로 깊게 숨을 내쉬며 말한다.
Road: … 길은 혼자선 멈추지 않아.
Simp: 그 말은…
Road: 우리가… 멈추게 한 거야.
Simp는 고개를 든다.
Simp: 그럼… 우리가 한 번 더 멈추면?
Road가 Simp를 바라본다.
그 눈 속에 처음으로 명확한 두려움이 깃든다.
Road: … 그땐, 이 길이 우릴 더 이상 "길 위"에 두지 않겠지.
Simp: 그게 무슨—
Road: 조금만 더 걸어. 제발.
둘은 다시 걸어간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길 위를 걷는 게 아니라, 길이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Simp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면, 뭔가 보일 것 같아서.
[EP.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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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 출발: "왜 걷기 시작했는가"
EP.2 반복: "같은 길을 걷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EP.3 기억: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가"
EP.4 시간: "이 세계의 시간은 왜 멈춘 것처럼 흐르는가"
→ 다음 에피소드 EP.6 기원: "이 길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coming soon)
작가의 말
우리는 멈추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쉬면 뒤처질 것 같고, 멈추면 잊힐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걷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고, 방향을 확인하지 않고.
그런데 Simp는 오늘 멈췄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그 멈춤에 반응했습니다. 마치 "왜 멈추느냐"라고 묻는 것처럼. 마치 "멈추면 안 된다"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왜일까요.
왜 이 길은 멈춤을 두려워할까요. 왜 Road는 "제발"이라고 말했을까요.
EP.6에서는 '기원'을 이야기합니다. 이 길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그리고— 이 길은 왜 만들어졌을까요.
당신은 오늘, 멈춰본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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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6 '기원'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