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모든 것을 바꾸었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았다
다낭 해변가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는 오늘도 같은 색이지만,
파도가 칠 때마다 다른 얼굴을 한다.
시간도 그런 것 같다.
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어떤 순간은 느리게,
어떤 순간은 빠르게 우리를 지나간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우리는 남는다.
시간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걷는다.
한국을 떠나 베트남으로 오던 날
인천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친구가 있었다.
"잘 지내, 연락할게."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거리가 단순히 3,000km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뒤돌아보면 이미 지나가 버린 흔적들만 남고,
그 속엔 웃음보다
미처 다 건네지 못한 말들이 더 많다.
"사실 너 없으면 외로울 것 같아."
"나도 네가 보고 싶을 거야."
그 말을 붙잡으려 할수록,
그림자처럼 멀어지는 얼굴이 있다.
말은 공기 속에 흩어지고,
마음은 문장에 담기지 못한 채 머문다.
베트남에 온 이 후
그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요즘 어때?"
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다시 쓰다가 또 지웠다.
'어떻게 설명하지?
이곳의 습한 공기와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혼자만의 조용함과 가끔 찾아오는 외로움을.'
결국 이렇게만 답했다.
"잘 지내, 너는?"
그때의 우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우리는 서로의 문장을 끝까지 들어줄 수 있었을까?
침묵이 대화가 되고,
그 속에서만 진심이 들리던 날들이 있었다.
시간이 멈춘 곳에서,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은 늘 '지금'에 머무르지 못한다.
다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여기서 사는 게 부럽다"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 바다를 보면서도
한국의 가을을 생각하고,
이 따뜻한 날씨 속에서도
겨울의 차가운 공기를 그리워한다.
과거를 붙잡고,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흘려보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어딘가로 향하지만,
정작 도착하지 못한 채
그 길 위에서만 산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이곳이 좋을 것 같았고,
이곳에 있으니 그곳이 그립다.
마음은 언제나
내가 없는 곳을 향한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건,
감정의 잔향이다.
지난주, 호이안 시장을 걷다가
어떤 향이 났다.
무슨 향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순간 한국의 어느 거리가 떠올랐고,
그 거리를 함께 걷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건 상처의 증거이자,
사랑의 잔재다.
잊었다고 믿는 순간에도,
문득 스쳐 오는 향기 나 빛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베트남에서 보는 석양은
한국에서 보던 석양과 다르지만,
그 앞에서 떠오르는 얼굴은 같다.
그건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는 '우리'다.
올해 한국에 잠깐 들어갔을 때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3년 만이었다.
우리는 처음엔 어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커피를 시키고
창밖을 보다가
동시에 웃었다.
"우리 왜 어색해하고 있어?"
그 순간 알았다.
만남은 순간이지만,
기억은 영원하다는 걸.
어쩌면 시간 이후의 우리란,
다시 만나지 않아도
서로를 기억하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시간의 끝에서도
여전히 '우리'로 남는다.
석양이 물에 자신을 비춥니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온기를 보냅니다.
사람도 그렇게
서로를 기억합니다.
시간이 모든 것을 바꾸었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았다.
그건 당신을 생각하는 이 마음—
시간 이후에도
여전히 여기에 남아 있다.
나는 오늘도 이 바다를 바라보며
당신을 생각한다.
그리고 안다.
이 마음이
시간보다 오래갈 것이라는 걸.
쉼표
베트남 다낭에서
2024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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