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지대에서 생긴 결심

도착도 출발도 아닌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하는가

by 쉼표

공항은 늘 어정쩡한 공간이다.

이미 떠나왔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 출발과 도착 사이, 시간의 틈에 걸쳐 있는 자리. 그곳에서는 누구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다. 여행객은 목적지에 속하지 않고, 출발지에도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 잠시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분명한 방향 위에 서 있는 상태다. 그 어정쩡함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인간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게이트는 세 번이나 바뀌었고, 출발은 늦어졌다.

숫자를 잘못 읽고 한참을 다른 탑승구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다시 티켓을 확인하고, 다시 걸었고, 또다시 걸었다. 공항 안에서만 몇 킬로미터를 이동했다. 발바닥이 욱신거렸고, 캐리어 바퀴 소리가 대리석 바닥에 울렸다. 몸은 지쳤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점점 또렷해졌다. 소란스러운 외부와 달리, 내 안은 조금씩 고요해지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중간지대는 혼란의 공간이 아니라 선택의 공간이라는 것을.

도착지에서는 늘 역할이 먼저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이 있고, 기대가 있고, 내가 서야 할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래서 도착지에서는 생각보다 결정이 먼저 나온다. 생각할 시간도, 흔들릴 틈도 크지 않다.

출발지에서는 감정이 남는다.

정리하지 못한 생각과 미련이 머문다. 잘 마무리하지 못한 말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싶은 장면들이 뒤를 잡아당긴다. 출발지는 그래서 종종 무겁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발이 뒤에 붙어 있는 것 같은 감각.

그러나 중간지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잠시 희미해진다.

역할도 미련도, 기대도 후회도, 조금 멀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틈에서 비로소 질문 하나가 또렷해진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태도로 갈 것인가.

우리는 확정된 상태를 좋아한다.

결과가 있고, 결론이 있고, 자리가 분명한 상태를. 소속이 있고, 이름이 있고, 설명이 가능한 상태를. 그래서 중간지대를 불편해한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 마치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사유의 흐름에서나 공통으로 등장하는 통찰이 있다.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라는 것. 삶은 도착지가 아니라 과정 안에서 의미를 만든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대부분 도착지가 아니라 중간지대에 놓여 있는 셈이다.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뿐인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빚어간다.

중간지대는 약한 곳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유연하고, 가장 솔직한 자리다.

그 자리에서 나는 선택했다.

전쟁하듯 밀어붙이는 대신, 정리하듯 바라보기로. 감정으로 반응하는 대신 구조로 읽어보기로.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먼저 문제를 이해하기로. 속도보다 방향을 먼저 확인하기로. 결론보다 질문을 더 오래 붙들기로.

그 결심은 거창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했고, 그래서 오히려 단단했다. 큰 소리로 선언한 결심은 쉽게 흔들린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공항 의자에서, 혼자 내린 조용한 결심은 깊이 박힌다. 말하지 않아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간지대는 우리를 시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묻는다. 지금 무엇을 붙들겠는가. 게이트가 바뀌고 일정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내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흔들리는 것들 사이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외부의 변수는 통제할 수 없다. 게이트는 또 바뀔 수 있고, 출발은 다시 늦어질 수 있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수도 있다. 그러나 방향을 확인하는 일, 태도를 붙드는 일은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이 중간지대가 가르쳐준 것이다.

도착하면 다시 역할이 시작될 것이다.

말해야 하고, 정리해야 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움직임의 출발점은 중간지대에서 생긴 하나의 결심이다.

흔들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확인하겠다는 태도. 빠르게 가겠다는 결의가 아니라, 정확하게 가겠다는 선택. 완벽하게 하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겠다는 방향.

삶은 종종 우리를 어정쩡한 자리에 세운다.

확실한 승리도 아니고, 분명한 실패도 아닌 자리. 성공이라 말하기엔 이르고, 포기라 말하기엔 억울한 자리. 그곳에서 우리는 방향을 잃었다고 착각한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사실은, 그 자리야말로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어정쩡함은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이다.

출발은 늦어질 수 있다.

도착은 예상과 다를 수 있다. 게이트는 또 바뀔 수 있고,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중간지대에서 무엇을 선택했는지는 오래 남는다. 그 선택이 다음 걸음을 만들고, 결국 목적지의 얼굴을 바꾼다.

공항 의자에 앉아, 나는 알았다.

서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정리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것을. 빠른 사람이 아니라 방향을 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것을. 강한 사람이 아니라 흔들려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심은, 이미 나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by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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