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의 글쓰기

— 땅에 떨어진 씨앗이 언어가 되기까지

by 쉼표




베트남의 새벽


베트남의 새벽은 고요하지 않다.

다섯 시, 아직 어둠이 채 물러나지 않은 시각. 골목 어딘가에서 쌀국수 육수 끓이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들어오고, 오토바이 한 대가 멀리서 기침처럼 시동을 건다. 이국의 아침은 늘 그런 식으로 시작된다. 낯선 소리와 낯선 냄새 사이에서, 나는 노트북을 펴고 하루의 첫 문장을 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오랫동안 이 질문 앞에 서 있었다. 해외생활 30년 넘게, 공장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부대끼는 삶을 살면서도, 결국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언제나 이 질문이었다. 매일 새벽 자판 위에 손을 올려놓을 때마다 묻는다. 오늘은 어떤 말이 나를 통해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그 물음에 답해준 것은, 뜻밖에도 들꽃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문장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산상수훈 강해」를 읽은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수많은 구절을 읽고 밑줄을 긋고 잊었지만, 유독 지워지지 않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마태복음 6장 28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풀어내는 대목이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로이드 존스는 이 구절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란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새들을 보라, 들꽃을 보라, 깊이 살펴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을 짓누르려 할 때에도 끝까지 생각하기를 고집하는 것,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동안 책을 덮지 못했다.

들꽃은 수고하지 않는다. 길쌈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꾸미려 애쓰지 않는다. 그런데 솔로몬의 영화가 이 꽃 하나만 못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가장 화려한 왕의 옷보다 들꽃 하나가 더 아름답다니. 그 아름다움은 어디서 온 것인가.

밖에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안에서 피어난 것이다.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린 물을 빨아올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자라난 줄기가 마침내 꽃잎을 펼치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 동안, 그렇게 피어난 것이다.

나는 그날 깨달았다. 글쓰기도 그런 것이라고.



온실의 꽃, 들꽃


세상에는 두 종류의 꽃이 있다.

하나는 온실 속의 꽃이다. 적정한 온도, 적정한 습도, 정해진 시간에 물을 받고, 영양제를 공급받으며 자란다.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조건 위에 놓여 있다. 조건이 사라지면 꽃도 시든다.

다른 하나는 들꽃이다. 길가에, 돌틈에, 황무지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에서 핀다. 비바람을 맞고, 짓밟히고, 가뭄에 말라가면서도 다시 고개를 든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강인하다. 그 생명력은 환경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나는 들꽃 같은 글을 쓰고 싶다.

트렌드에 맞추어 키워드를 배치하고,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제목을 뽑고,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문장을 다듬는 것 — 나는 그것도 할 줄 안다. 콘텐츠 시대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것만으로는 글이 살아남지 못한다.

온실의 꽃은 온실이 무너지면 함께 무너진다. 알고리즘이 바뀌면 사라지는 글, 트렌드가 지나면 잊히는 문장, 클릭은 되지만 마음에 남지 않는 언어. 그것은 글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글의 생명을 갖지 못한 것이다.

들꽃은 다르다. 들꽃은 환경을 선택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리에서 핀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눕되 꺾이지 않는다. 아무도 읽지 않아도 쓰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피어난다. 그 꿋꿋함이 시간이 지난 뒤에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바로 그런 글이다.

들꽃의 생명력-20260403_135216919.jpg


세 가지 뿌리


들꽃의 글쓰기에는 세 가지 뿌리가 있다.


첫째,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공장에서 일하는 베트남 직원의 얼굴, 아침마다 마주치는 쌀국수집 주인의 인사, 먼지 날리는 공업단지의 풍경. 눈에 보이는 것만 기록하면 그것은 르포르타주가 된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은 그 너머에 있다.

쌀국수집 주인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육수를 끓이는 손에는, 이 나라가 겪어온 전쟁과 가난과 그럼에도 삶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공장에서 묵묵히 재봉틀을 돌리는 스무 살 여공의 눈에는,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어른거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읽을 때, 비로소 글은 표면을 뚫고 심장에 닿는다.

이호창 박사님이 쓰신 글에서 읽은 문장이 떠오른다. 성경의 문자 속에 머물던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 세계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실재로 다가온다는 것. 영적 문해력을 회복하면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읽는 눈, 그것이 영적 문해력이고, 그것이 글쓰기의 첫 번째 뿌리다.


둘째, 세상에서 얻어지는 산물들을 글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나는 서재에 앉아 책만 읽으며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30년 넘도록 해외 제조업 현장을 걸어온 사람이다. 중국대련,개성공단,베트남 땀끼 공장의 먼지, 현지 직원과의 갈등과 화해, 이국에서 맞는 명절의 외로움, 타국어 속에서 모국어를 지켜내는 고단함. 이 모든 것이 내 글의 토양이다.

들꽃은 허공에서 피지 않는다. 반드시 땅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곳이면 충분하다. 내 글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경험이 아니어도 된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작은 사건들, 스쳐 지나가는 표정들, 계절이 바뀔 때 느끼는 공기의 변화. 그것들이 모여 한 편의 글이 된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당장 꽃이 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껍질이 갈라지고, 물을 머금고,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 그 시간이 있어야 비로소 싹이 트고, 줄기가 올라오고, 마침내 꽃잎이 열린다. 글도 그렇다. 경험이 곧바로 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오래 숙성되어야 한다. 때로는 몇 달, 때로는 몇 년. 그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일이다.


셋째,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들꽃의 아름다움은 겸손하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화원의 장미처럼 이름표를 달고 서 있지 않는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하는 것이다. 아, 여기 꽃이 피었구나. 그 순간의 조용한 놀라움. 그것이 들꽃의 방식이다.

내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읽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치지 않는 글. 조용히 곁에 놓여 있다가, 누군가의 하루가 힘들었던 저녁에 문득 떠오르는 글. 화려한 수사 없이도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글. 당장 많이 읽히지 않아도, 읽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 있는 글.

그것이 내면의 아름다움이다. 밖으로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배어나오는 것. 솔로몬의 영화가 들꽃 하나만 못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만들어낸 아름다움은 만든 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피어난 아름다움은 그것을 피워낸 생명의 크기만큼 깊다.



살아남는 글


나는 가끔 내 글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려워진다.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AI가 쏟아내는 문장들 사이에서, 점점 짧아지는 사람들의 주의 집중 시간 앞에서.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쓰는 이 문장들이 과연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럴 때 나는 들꽃을 생각한다.

들꽃은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는다. 그냥 핀다. 비가 오면 비 속에서 피고, 가뭄이 오면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누군가 밟으면 옆으로 비껴서 다시 올라온다. 그 꿋꿋함이 들꽃을 들꽃이게 만든다.

이승섭 평론가님의 글에서 읽은 것처럼, 문학은 더 이상 답을 내리는 매체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최후의 보루다. 서구 중심의 단일한 흐름이 무너지고 다극화된 문학 생태계 속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나는 목소리가 모여 새로운 숲을 이룬다.

나는 베트남이라는 변방에서 글을 쓴다. 한국 문단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러나 들꽃은 정원의 중앙에서만 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길가에서, 돌틈에서, 누구도 돌보지 않는 자리에서 피어날 때 가장 강인하다. 변방이라서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변방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이 있다.



나에게 먼저 말하기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도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 말하라고. 아침에 눈을 뜨면 온갖 생각이 먼저 말을 걸어온다. 어제의 문제, 내일의 걱정, 자신의 부족함. 그때 그 생각들에게 끌려가지 말고, 내가 먼저 나에게 말하라고.

나는 매일 새벽 그렇게 한다. 자판 앞에 앉아, 나에게 먼저 말한다.

나는 쉼표다. 멈춤이 아니라 이어짐이다. 마침표가 아니라, 다음 문장으로 가는 숨이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거북이처럼, 들길에 피는 들꽃처럼, 오늘도 한 문장을 쓴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일이다.

지금 쓰는 이 문장이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으리라는 것을 믿는 일이다. 땅에 떨어진 씨앗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다. 오늘 아무도 읽지 않아도, 이 글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다.

들꽃은 자기가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냥 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도 그렇게 쓰겠다. 들꽃처럼, 피어나겠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느니라."

— 마태복음 6:28-29



쉼표 로고와 새벽 바다 위 떠오르는 태양 상징 이미지

나는 멈추지 않는다. 쉼표 하나를 놓을 뿐이다.

#들꽃의글쓰기 #마음이걷는길 #쉼표JEONGSEON #에세이 #글쓰기철학 #들꽃 #생명력 #마틴로이드존스 #산상수훈 #마태복음 #들의백합화 #변방의글쓰기 #베트남 #새벽글쓰기 #쉼표 #느리지만멈추지않는다 #브런치작가 #힐링에세이 #내면의아름다움 #글쓰는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