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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든솔 Aug 18. 2024

헤드폰을 샀다

망원경 하나 어때요?

 대학생 시절, 헤드폰을 샀다. 지금이야 헤드폰을 쓰고 거리를 거닐어도 누구 한 명 눈길을 주지 않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헤드폰을 쓴 채 돌아다니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샀다.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나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저 사람 음악하는 사람인가 보다' 하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머리가 눌리는 게 신경 쓰여 모자라도 쓴 날이면, 그리고 하필 그날이 밴드 합주를 위해 베이스를 멘 날이면 더할 나위 없는 고독한 베이시스트 패션이 완성되었다. 남들의 시선을 누구보다 의식하는 나였지만 개의치 않고 헤드폰을 샀다.

 헤드폰은 20만 원짜리였다. 가난한 대학생에게는 수십 번의 점심과 맞바꿀만한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을 쪼개어 건대입구역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미리 점찍어둔 헤드폰을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한 달 동안의 아르바이트 비용을 1초 만에 지불하는 순간임에도 헤드폰을 살 땐 설렘과 기대뿐이었다.

 

 어느샌가부터 대형 서점에는 스피커와 헤드폰이 들어섰다. 서점에서 CD나 아이돌 굿즈를 함께 팔게 되면서 자연스레 들어오지 않았을까. 아무튼 나에겐 희소식이었다. 서점에 가는 것을 즐기진 않았지만 덕분에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겐 서점에 갈 이유가 생긴 것이다. 장난감 가게를 쉬이 지나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서점에 갈 일이 생기면 스피커 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동안 온갖 스피커에 휴대폰을 연결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내 음악 취향을 전파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부턴 일종의 루틴처럼 자리 잡아버려서 항상 듣는 음악도 생겼다. 그때 듣던 크러쉬의 'Woo ah(우아해)'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스피커나 헤드폰의 성능을 테스트해 주는 기준이다. 그렇게 대형 서점에서의 디제잉을 마치고 나면 옆 코너로 이동해 헤드폰으로도 음악을 들었다. 늘 휴대폰을 사면 함께 주는 기본 이어폰으로만 음악을 들어왔던 나에겐 충격이었다. 들리지도 않던 베이스 소리가 가슴을 울렸고, 가수의 숨소리까지 세세하게 들렸다. 그때부터 마음속에는 언젠가 돈이 생기면 좋은 헤드폰과 비싼 스피커를 사야겠다는 마음이 자리 잡았다.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들으면 확실히, 음악의 맛이 다르다. 일단 주변의 소리를 거의 완벽하게 차단해 주기 때문에 음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때문에 모든 구성음들과 악기들의 소리를 하나씩 모두 음미할 수 있다. 잘 차려진 뷔페에서 첫 접시에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듯, 귀를 어느 악기에 먼저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음 접시에는 무엇을 담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다음 곡은 무얼 들어야 맛있을지 정한다. 내가 테스트 곡으로 들었던 크러쉬의 'Woo ah(우아해)'를 처음 헤드폰으로 들었을 때, 크러쉬가 곡의 거의 모든 구간에 화음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매번 듣던 음악이었지만, 새롭게 들렸다. 

 그럼에도 헤드폰의 단점은 분명하다. 요즘같이 편의성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헤드폰이 웬 말인가. 가볍고 편한 에어팟 대신 무겁고 불편한 헤드폰이라니. 여름에 땀이라도 나게 되면 귀도 헤드폰도 음악도 엉망이다. 하지만 같은 음악도 더 깊고 풍성하게 바꿔주는 헤드폰을 하나쯤 갖고 있는 건 강력하게 추천한다.


서랍 속에 있던 하우스 오브 말리 사의 유선 헤드폰. 연결선은 고장 났다.

 

"우리 아이가 망원경을 너무 갖고 싶어 해서요... 혹시 어떤 망원경을 구매하면 될까요?"


종종 학부모님들에게 망원경 구매에 관한 문의를 받는다. 내어놓는 대답은 보통 비슷한 편이다. 


 "아이들이 천문대에서 사용하는 망원경은 꽤나 고가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가격의 망원경을 생각하고 구매하실 예정이라면 추천하지 않는 편이에요. 아이들이 실망할 수도 있거든요. 그럼에도 구매 의향이 있으시다면 예산을 정해서 알려주세요. 적당한 망원경을 몇 개 추천해 드릴게요."


 진심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천체 관측이란 취미는 아쉽다. 자주 누릴 수 있지 않기에 쉽게 버려지기도 쉬운 법이다. 또한 흥미에 취해 고가의 망원경을 무턱대고 사버린다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가능성도 크다. 인터넷에선 흔한 허블 우주망원경의 사진을 기대하며 밤하늘을 조준하면 '뭐야... 사진으로 보던 별들이랑은 다른데? 이게 뭐야!'라며 환불 욕구가 샘솟을지도 모른다. 늘 그런 반응이 두려워 준비한 대답을 반복하지만, 사실 마음 한 구석에는 적당한 가격의 망원경이라도 하나 사서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다.


 망원경은 헤드폰 같은 존재다. 비싸고 거추장스럽고, 무겁다. 잘 분해해서 가방에 넣어두어도 부피를 많이 차지한다. 하지만 한 번 맛보면 갖고 싶어 진다. 헤드폰을 통해 들은 음악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다시금 깨닫고 구매를 꿈꿨던 것처럼, 망원경을 통해 본 우주는 우리에게 밤하늘을 보는 또 다른 눈을 뜨게 해 준다. 자주 보던 것들도 망원경으로 보면 새롭다. 

 천체 관측에 취미가 들려 망원경을 산 이들이, '망원경 진짜 잘 샀다!'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달이나 행성 관측을 추천한다. 그런 흔한 거 말고 밤하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신비한 대상들을 원한다고? 직접 보면 다르다. 달에 존재하는 수많은 크레이터들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보이는지는 직접 본 사람만 안다. 행성은 또 어떤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저 '유난히 밝은 별' 정도인 행성들을 망원경으로 겨누면 어느샌가 렌즈 속에 보이는 작은 시야에서도 눈을 돌리며 관측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망원경을 통한 천체 관측에 흥미가 생겼다면, 이제는 무대를 넓힐 차례다. 도심에서 벗어나 인적과 불빛이 드문 곳에서 망원경을 꺼내보자. 잘 만든 음악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들어도 황홀하지만, 헤드폰으로 듣는다면 그 황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잘 차려진 밤하늘 역시도 그렇다. 바닥에 누워 눈으로만 보아도 감동이 밀려오지만,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훑어본다면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성운, 성단, 은하 같은 천체들까지 모두 감상할 수 있다.


망원경 하나 어때요?


 앞서 말한 대로 십수 년 전만 해도 헤드폰을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중교통 안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헤드폰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편의성이 현대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지금, 헤드폰은 더욱 빠르게 사장될 것처럼 보였지만 예전보다 헤드폰을 쓴 사람들은 더 많이 보인다. 음악 감상에 진심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까닭인 걸까. 그저 패션 아이템의 하나로 자리 잡아서일까. 뭐, 이유가 어찌 됐든 헤드폰 사용의 높은 만족도가 점점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가고 있다는 뜻 아닐까. 망원경도 똑같다. 밤하늘 관측이라는 낭만뿐인 취미에 이미 풍덩 빠진 상태라면, 망원경이라는 한 스푼의 낭만은 추가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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