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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Aug 20. 2024

로또 1등에 당첨이 되면 뭘 하고 싶어요?

- 집, 차, 땅 말고요.

  꽉 막힌 주말의 서울-양양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뻔하지만, 즐거운 주제가 나왔다. "이번 주 당첨 금액은 인당 21억이래요. 전 로또 당첨되면 아빠 일 그만두라고 하고, 저 연구실 다닐 때 차 태워달라고나 할 거예요." 그녀는 서울 안은 바라지도 않는다며 자신이 평생 산 동네에 아파트 하나를 마련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아버지를 실직자로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그 장난스러운 어투에 웃음이 터졌다. "쌤은요? 로또 1등 되면 뭐 하실 거예요?" 곧 물음은 나에게 넘어왔다. 당연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집과 차였다. 대출 갚아야죠, 저도 경기도에 집 하나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경차 말고 좀 더 안전한 차를 타고 싶어요 같은 전형적이고 속물적인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공감을 받은 건 덤이다. 한국인이라면, 아니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안정적인 집과 편리한 차는 필수 요소였고, 우린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신나는 여행길에 재미없는 어른의 이야기를 불쑥 꺼낸 것 같아 미안했다. 공감은 받았지만, 마음이 씁쓸했다. 그래도 어디에 집을 사면 좋을지, 어떤 차를 살지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내 수업 중엔 로또에 당첨된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럼 난 아이들에게 한 번씩 묻는다. "그 사람은 정말 로또에 당첨됐어! 가지고 싶은 건 다~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건 다~할 수 있지. 너희들이 만약 주인공이라면 뭘 하고 싶어?" 되돌아오는 대답을 떠올려보면 집과 차를 외쳤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디즈니랜드에 또 갈래요, 닌텐도 포켓몬 게임 살래요, 강아지를 키울 거예요, 전 도마뱀 키우고 싶어요, 제 방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어떻게 하면 얻은 여유를 행복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다. 대출 없는 집과 안전한 차 따위를 이야기하는 어린이는 없다. 어쩌면 그런 걸 얻어봤자 걱정이 사라질 뿐, 즐겁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천문대 학생들보다 서너 살 더 많은 우리 집 막둥이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카드를 모은다. 그것도 똑같은 걸 수십 장씩 가지고 있다. 그 카드를 얻기 위해 동생은 받은 용돈을 잔뜩 투자한다. 그러다 보면 친구들이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배를 채울 때 동생은 겨우 음료수 한 캔을 마신다. 다 그놈의 카드 때문이다. 어쩔 땐 출출하다며 가족에게 전화가 온다. 용돈은 카드를 사느라 다 써버렸다니 괘씸했지만, 우리집 귀여운 막내가 배가 고프다는데 어떡하나, 그냥 용돈을 조금 더 보내줄 뿐이다. 나도, 가족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날은 답답한 마음에 다그쳤다. "왜 용돈을 그런 캐릭터 카드를 사는 데 낭비해?" 동생은 울먹이지만 당당하게 대답했다. “용돈은 내가 원하는 데 쓸 수 있는 것 아냐? 난 그 카드 모아서 같을 걸 좋아하는 애들이랑 이야기하는 게 좋아. 재밌어. 그건 내 용돈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할 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었다. 용돈은 간식비와 교통비에 조금 더 보탠 정도로 책정되었다. 막내는 조금밖에 얹어지지 않은 자유를 많이 쓰기 위해 먹을 것을 좀 줄였고, 교통비를 아꼈을 뿐이다.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 말이다.

  내가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 평소 내가 가진 것에서 부족하지만 열심히 쪼개고 또 아끼며 기꺼이 투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학생들과 막냇동생에게 배운 '진정한 취미 생활'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당장 큰돈이 생긴다면 본인들의 행복을 찾기 위해 쓸 것이다. 막내에게 지금 당장 큰돈이 생긴다면 먼저 성에 찰 때까지 그 카드를 사 모을 것이다. 집과 차 따위의 지루한 것 말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 본다. 여느 직장인들처럼 내 월급은 대출과 카드값과 월세가 스치면 우수수 쓸려나가지만, 그러고 남은 나의 작은 자유는 차곡차곡 쌓인다. 마치 동생이 용돈을 아껴가며 캐릭터 카드를 사는 것처럼, 난 알뜰히 모은 여유를 가지고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지금은 큰 결심을 하고 떠나지만, 로또 1등에 당첨되면 고민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것이다.


  이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곳 천지다. 알지 못하는 세상이 너무나도 많다. 손은 운전대를 붙잡고 있지만 생각은 날개를 달고 꽉 막힌 고속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파도의 푸른 보리밭이 궁금하고, 독도의 바다가 보고 싶다. 아프리카의 드넓은 초원과 남아메리카 사막 위로 펼쳐진 끝없는 별, 저 북쪽 땅의 오로라와 갈라파고스섬의 새들은 어떤 모습일까. 그 풍경 안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은 높은 산꼭대기와 깊은 바다 아래를 지나 기어이 땅을 박차고 우주로 나아가 지구를 내려다본다. 로또 1등만큼의 여유를 얻는다면, 이 모든 곳으로 직접 갈 테다!


2024년 6월 10일(현지 시각) 관광객들이 VSS 유니티 안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버진 갤럭틱 

  운이 좋게도 민간 우주 시대에 이르지 않게 태어났다. 스페이스 엑스사와 보잉사 등등 미국의 민간 우주 기업들이 NASA와의 계약을 통해 국제 우주 정거장에 우주인과 보급품을 운송하고 있다. 그전에는 러시아에 우주인 한 명당 1,100억원이 되는 돈을 지불하고 발사했었다. 반면 스페이스 X는 재사용 로켓 개발에 성공하며 한 번 발사하는 데 약 900억 원을 청구한다. NASA는 수년 안에 모든 수송 임무를 비교적 저렴한 민간 기업에 넘길 생각이라고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민간 우주 기업들이 우후죽순 생기는 중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중국에는 무려 100개가 넘는 스타트업 기업이 생겼다고 한다. 그 중엔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며 경쟁력을 가진 곳도 있다고 한다.

  나의 관심을 끄는 건 '우주여행'을 상품으로 내건 기업이다. '버진 갤럭틱', '블루 오리진'과 같은 기업은 준궤도 비행을 돈으로 판매한다. 가격은 한화로 약 6억 원, 훈련 시간 3일, 총관광 시간 약 60분, 그 중 무중력 체험은 약 4분이다. 잠깐 까만 우주를 배경으로 태양 빛을 받아 빛나는 둥근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비록 고도 100km를 넘지 않는 준궤도 비행이라 국제우주정거장(고도 약 400km)에 체류하는 우주인들처럼 지구를 한 바퀴 돌 순 없다. 그래도 로또 1등에 당첨금액으로 지불할 수 있는 가격에 우주를 갈 수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다. 시간이 흘러 안정적인 항해가 가능해지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달과 화성에 여행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저렴해진다 한들 큰돈이겠지만, 돈만 있다면 갈수 있다! 우주여행! 누가 마다하겠는가!




  문득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음에도 바로 '여행'이라 답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대화 주제가 한참 다른 길로 벗어난 후였다.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여행을 떠날 거예요. 가능하다면 우주여행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아쉽게도 남은 여행 동안 그 말을 할 기회는 없었다. 잘 기억해 뒀다가 누군가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땐 당당히 대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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