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리에디슨손성목영화박물관
도로 옆 긴 소나무 숲을 빠져나오자,
호수의 고장이었다.
강의 밑바닥이 새파랬다.
박물관에 차가 멈춰 섰다.
여기는 강릉입니다. 차에서 내리자 건너편에 푸른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아니랍니다. 바다와 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경포호라고 하네요. 바다로 착각할 만큼 크고 잔잔한 호수였습니다. 어젯밤 우리는 부산에서 4시간을 달려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초당두부는 유명세만큼이나 고소하고 맛있더군요. 술러덩 넘어가는 하얀 반찬으로 단백질을 보충하고 '참소리에디슨손성목영화박물관'에 도착한 참입니다.
박물관 이름이 참 길죠? 이곳은 손성목 관장님이 70년간 모은 물건으로 꾸며진 곳입니다. 여러분, 무려 70년입니다. 관장님 나이가 올해로 84세인데 그럼 14살부터 수집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네, 짐작하신 대로 좀 사는 집의 아들이셨다고 해요. 당시 백화점을 운영하던 관장님의 아버지는 6살짜리 아들을 백화점으로 불러 원하는 물건을 고르게 했대요. 그때 선택한 축음기는 한국전쟁 피난길에도 포기하지 않고 가져갈 정도로 애착이 강했답니다. 그 열정은 지금도 꺼지지 않아 수집은 현재진행형이에요. 어마어마한 정성입니다.
이곳은 참소리 박물관, 에디슨 과학 박물관, 영화 박물관 이렇게 세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요. 도착하면 우선 중앙에 있는 참소리 박물관으로 들어가세요. 표를 사고 해설을 듣고 싶다고 하면 어디서 대기하면 되는지 알려줍니다. 도슨트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 사람을 모아서 진행하는 것 같았어요. 이미 설명이 진행 중이어서 우리는 2층에서 합류했습니다. 모자란 부분은 다시 도슨트를 진행할 때 따라가서 들으면 됩니다.
시간이 없으면 도슨트 없이 수집품만 보고 나오면 안 되냐고요? 아니요, 아니요, 안 될 말입니다. 단칼에 잘라 말씀드릴 수 있어요. 왜냐하면 여기는 전시품이 반, 해설이 반을 차지하는 곳입니다. 할 수 있다면 전시 해설을 해주셨던 두 분을 함께 전시하고 싶을 정도예요. 그만큼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재밌습니다. 나긋한 목소리에서는 풍부한 지식에서 나오는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지더군요. 아이와 어른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와 유머감각도 발군이셨어요. 무엇보다 참소리, 에디슨 박물관을 설명해 주셨던 남자 도슨트 선생님은 손성목 관장님과 함께 수집을 하러 돌아다니기도 하셨나 봐요. 이야기 도중에 떠오르는 추억의 눈빛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용카드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가방 가득 지폐를 담아 경매를 다니셨던 이야기, 몇 달러가 부족해서 경매품을 사들이지 못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되어 빈민가의 숙소만 골라서 숙박하신 이야기, 그러다가 강도를 만나 왼쪽 어깨에 총을 맞은 이야기, 갖고 싶은 수집품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물건을 달라 떼쓴 이야기, 자기가 죽으면 자식들한테서 내 물건을 사라는 지인의 얘기에 일주일마다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 등등.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관장님이 생생한 주인공이 되어 귓가에서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그곳에 있는 전시품은 소장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새로운 물건으로 교체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를 수집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축음기와 에디슨 관련 물품, 영사기를 보다 보니 집념을 넘어 인간의 광기마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거북했냐고요. 아니요. 전 무언가에 대단히 미쳐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또 존경합니다. 그런 사람은 뭘 하든 성공한다고 믿거든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요소 중에 자신을 불태울만한 무언가를 찾아낸다는 건 운명의 짝을 만난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고대하던 수집품을 손에 넣을 때마다 느꼈을 희열이, 그 황홀함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반쯤 살아온 스스로의 인생에서 무언가를 좋아하고 푹 빠졌던 경험이 분명 있습니다. 그때 느꼈던 설렘과 감동을 한참 동안 잊고 살았어요. 밤을 새워가며 집중했던 열정의 시간이 저에게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이대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밋밋한 생을 마감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열심히 글을 써서 인생을 불태워보라는 신의 계시일까요.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무언가를 수집해 보라는 취미의 발견일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저 박물관 밖으로 나와 휴대폰으로 이 글을 적고 있어요. 처음으로 발에 차이는 돌멩이를 집으로 가져가야겠다는 마음과 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