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 이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삶
정희는 요즘 큰딸 세아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속으로 말을 삼킨다.
뭘 해줘도 고맙다는 말은커녕, “그냥 냅둬”라는 눈빛만 보내는 아이.
그럴 때면, 그녀는 예전의 자신을 본다.
고3, 세상에 혼자 삐딱하게 서 있던 시절의 정희.
정희가 대학에 떨어졌던 해,
엄마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위로도 없었고, 한숨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엄마는 방 문 앞에 서서 말했다.
“재수해라. 정희야, 넌 할 수 있어.”
정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했다.
“안 해. 나 그냥 돈 벌 거야.”
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며칠 뒤 저녁, 조용히 밥상에 김치찌개를 올려놓고는,
수저 대신 작은 전단지 하나를 꺼냈다.
간호조무사 학원 홍보지였다.
“이것도 병원에서 일하는 거니까, 재수 안 할 거면 이거 해보자.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돈을 벌든 뭐를 하든 할거 아니야. 넌 병원일 잘할 거 같아”
정희는 말없이 국물만 떠먹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토요일 아침.
정희가 여전히 이불속에서 헤롱거릴 때,
엄마가 문을 벌컥 열고 말했다.
“일어나. 학원 등록하러 간다.”
“진짜?”
“진짜지.”
엄마는 속눈썹도 없이 수분크림만 바르고,
가방에 달걀 두 개를 싸들고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정희는 비몽사몽 한 얼굴로 따라나섰다.
학원은 생각보다 번듯했다.
그런데 정희는 입구 간판 밑에 ‘신입생 환영합니다!’라는 풍선장식이 걸려 있는 걸 보곤
괜히 더 민망했다.
“엄마, 여기 나 같은 애가 한둘이 아니겠지?”
“그럼, 수두룩하지. 저기 저분도 봐봐. 나보다 더 나이 많아 보이네.”
엄마는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그 사람이 돌아보는 바람에 정희 팔을 퍽 쳤다.
“너 때문에 민망하잖아.”
“내 탓이야?”
“말 시키지 마. 지금 가서 등록서 써.”
정희는 얼떨결에 등록신청서를 받아 들고
엄마가 챙겨 온 신분증이든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그러면서도 마음속 한편이
기묘하게 든든했다.
학원 수업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사람을 돌보는 일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지 처음 알았다.
실습도 성실히 다녔다.
하지만 어느 날, 작은 병원 실습 중에
정희는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이거 아직 안 치우셨어요?”
“그건 간호사 업무 아니잖아요.”
간호사 A 씨가 조무사 선생님에게 툭툭 던지는 말투.
정희는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그 장면을 보며,
가슴 어딘가가 조용히 아릿했다.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선이 그어져 있는 걸까.
나도 저렇게 대우받게 되는 걸까.
지금 이 길이 나한테 맞는 길일까.
불쑥,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정희야, 간호사 해봐.
여자가 평생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이야.”
그날 밤, 정희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간호조무사도 진짜 열심히 일하는데…
간호사랑 왜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거야?”
“그게 현실이야.
엄마가 너 간호사 하라고 한 이유, 이제 좀 알겠니?
똑같이 힘든 일 하는데, 사회는 그렇게 구분 지어.
넌, 당당하게 너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 되어야 해.”
간호조무사 실습을 마치고 어느 날,
정희는 결심했다.
"나, 간호대학 갈래."
엄마는 그날 저녁 아무 말 없이 김을 굽더니
“단과학원 등록비는 네 아빠 몰래 내가 마련했어.”
정희는 놀랐고,
“어떻게?” 하고 묻자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몰래 반찬값에서 하루에 천 원씩 띄어놨다.
이래 봬도 내가 반찬 없이도 살 수 있는 여자야.”
정희는 웃다가
엄마 등 뒤에서 김 냄새가 올라오는 걸 보고
그 웃음이 울컥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정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음 날, 스스로 단과학원에 등록했다.
수능까지 두 달도 남지 않은 날이었다.
자신이 직접 시작한 첫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정희는
서울에 있는 간호대학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었다.
엄마는 등록금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네가 대학 가면,
엄마는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거 같더라.”
그날, 엄마는 정희보다 한 발짝 뒤에서
언제나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지금 정희는 세 딸의 엄마다.
그중 고등학생이 된 큰딸 세아는
요즘 점점 말수가 줄고 있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혼자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간다.
정희는 안다.
그 문 뒤에서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어떤 어른이 되고 싶은지를 아직은 말할 수 없다는 걸.
엄마는 늘 조금 뒤에 있었다.
앞장서 끌지 않고, 소리쳐 재촉하지 않고.
그저 내가 멈춰 설 때,
작게 등을 밀어주던 사람.
그때는 그게 간섭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사랑의 방식이었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사람.
엄마는 늘 나보다 반 발짝 느렸고,
나보다 두 발짝 뒤에 있었지만,
그 자리에 오래, 오래 있었다.
지금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알겠다.
가끔은 한 발 앞보다
한 발 뒤에서 걷는 사랑이 더 멀리 가는 법이라는 걸.
“엄마는 조용히 따라오면서
내가 제풀에 포기하지 않게
뒤에서 꼭 한 번씩—
‘안 해? 그러지 마!’ 하고 쿡 찔렀다.”
그 말이
그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