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내 이름은, 어디로 갔을까

쉰 살, 처음으로 나를 불러보았다 -윤정희

by UNI

윤정희는 자기 이름을 오래도록 부르지 않았다.

누군가 “정희씨” 하고 불러도, 그게 자기인 줄 모르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습관처럼 대답할 뿐이었다.

사실, 이름은 늘 따라다녔다.

병원에서는 "윤정희 간호사 선생님",

학교에서는 "윤정희 학생",

가정에서는 "엄마", "여보, 자기"라고 불렸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역할 속의 이름이었다.

정작 '사람 윤정희'를 불러주는 목소리는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조금 무거운 이름’이 돼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간호사’, ‘학위 과정 중인 학생’이라는 이름으로만 살았다.

정희라는 이름은 점점 멀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정희는 더 이상 정희가 아니었다.

어릴 적, 정희는 말이 느렸다.

입술 앞에서 단어가 자꾸 걸렸다.

말끝을 내뱉기까지 속이 조급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걸 들킬까 봐 말을 줄였다.

“얘는 좀 조용하네.”

“얌전하니 공부는 잘하겠어.”

입을 다물었을 뿐인데, 그런 말들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더 침묵했다.

말 대신 생각이 많아졌고,

써보지 않은 문장들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갔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정희는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쳤다.

친구들 손에는 늘 있었고, 내 손엔 없던 알록달록한 것.

엄마는 식당일과 파출부 일을 병행했고,

가끔 들른 집에서는 비닐봉지에 담긴 빵을 꺼내 식탁에 올렸다.

세 남매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그 빵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게 단지 빵이어서가 아니라,

엄마가 우리를 위해 견뎌낸 하루의 끝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정희는 아버지 지갑에서 500원을 꺼내다 들켰고,

무섭게 혼이 났다.

하지만 더 오래 남은 건, 말없이 등을 돌린 엄마의 뒷모습이었다.

설거지하던 물속에 손을 담근 채,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그 장면.

그날 이후, 정희는 훔치지 않았다.

대신 결심했다.

언젠가, 내가 원하는 걸 당당하게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그 어린 결심이 지금까지 그녀를 끌고 온 건지도 모른다.

대학 1학년,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다.

열 번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사이였다.

서로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기보다,

서로를 놓치면 내가 더 초라해질까 봐

붙잡았던 시간이었다.

스물아홉, 결국 그 사람과 결혼했다.

그해 겨울, 정희는 첫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두 딸이 더 뒤따라왔다.

사랑스러웠고, 벅찼다.

하지만 육아는 상상보다 더 복잡했고, 고요하지 않았다.

4시간쯤 자고 새벽 인계를 받으러 나가야 했다.

밤새 울던 아기를 재우고

남편과 아이들 아침을 차려놓고

불 꺼진 부엌을 나서던 날들.

그 출근길에, 괜히 목이 메곤 했다.

육아휴직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희는 늘 일했다.

세상과 연결된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직 ‘쓸모 있는 사람’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공부했다.

전문대에서 시작해 야간 수업, 온라인 강의, 대학원 강의실까지.

결국 박사학위까지 손에 쥐었다.

논문 준비로 밤을 새우던 날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던 새벽들,

그녀는 늘 잠이 부족했지만, 그만큼 삶은 단단해졌다.

임상현장 근무를 줄이고 회의와 조율을 맡기 시작한 뒤에도,

정희는 여전히 손끝을 살펴보곤 했다.

간호사의 손은 늘 맨손이어야 했고,

그 손끝으로 여전히 사람을 만지고 있었으니까.

화려한 매니큐어를 바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희는, 단정한 손톱 사이로라도 나다운 무언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자신의 손은 점점 투명해졌지만,

그 손끝으로 살려낸 생명들이

조금씩, 그녀의 자존감을 되살려주었다.

그리고 쉰 살이 되었다.

아이들은 컸고, 병원도 익숙했고,

남편과의 관계도 어느 지점에 안착해 있었다.

그런데 문득, 허전했다.

‘내가 정말 나로 살고 있는 걸까?’

그날 새벽, 정희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윤정희.”

낯설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리워했던 감정 같았다.

아무도 없는 부엌.

커피 한 잔 앞에 두고

정희는 노트북을 열었다.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윤정희’라는 이름으로 쓰는 첫 번째 문장.

그렇게, 글이 시작되었다.

DALL·E 2025-04-15 10.11.31 - A refined and clear early morning kitchen scene with soft golden light streaming through a window. On a wooden table sits a warm cup of coffee and a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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