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은 옆자리에서 온다
같이 있어도, 마음은 멀 수 있다.
신뢰가 무너진 뒤에야,
나는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정희는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 손에 이끌려 미팅 자리에 나갔다.
고려대 정문 앞, 간판 벗겨진 허름한 호프집,
안엔 연기가 자욱했지만,
그땐, 그런 데가 참 낭만처럼 느껴졌다.
두 명씩 마주 앉은 테이블,
건너편 남자, 태수가 첫 잔을 들며 말했다.
“그거 알아요? 라디오에서 들은 건데…”
모두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쓱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살짝 옆으로 뿜었다.
“여자랑 술 마시다가 담배를 앞으로 뿜으면 ‘싫다’는 의미고,
위로 뿜으면 ‘하늘이시여 왜 이런 여자를...’
근데 옆으로 뿜으면, ‘맘에 든다’래.”
그리고는 정말로,
조심스레 고개를 틀며 연기를 옆으로 뿜었다.
의도적으로, 아주 대놓고.
순간, 정희는 술잔을 들다 말고 웃을 뻔했다.
‘아, 이 남자… 나 맘에 드나 보다.’
그때는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고,
눈치도 없는 친구들 덕에
둘 사이의 기류는 그 연기처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갔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알아봐 준’ 느낌.
며칠 뒤, 그 남자—태수가 따로 연락을 해왔다.
“혹시 시간 되면, KFC 앞에서 볼래?”
정희는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그... 그... 글쎄.”
그렇게 둘의 첫 데이트는 혜화동 KFC 앞에서 시작되었다.
커피를 마시며 말이 많지 않은 둘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했다.
사람이 적은 한적한 대학로 골목,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정희는 태수가 자꾸만 웃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나... 너 좋다.”
태수는 그렇게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그 후, 그는 거의 매일 정희를 데리러 왔다.
학교 앞 벤치, 도서관 앞, 혹은 강의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캠퍼스 곳곳에서.
그는 참 성실한 구애자였다.
정희는 생각했다.
‘나를 이렇게 매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니.
그건 사랑이겠지.’
그렇게 8년을 만났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싸우고 또 화해하고.
그러다 29살에 결혼했다.
첫사랑, 첫 남자, 그리고 마지막 사랑.
그래서 결혼은 당연했다.
고민은 없었다.
‘이 사람이면 되겠다’가 아니라,
‘이 사람밖에 없다’였다.
결혼하고 첫 딸 세아를 낳고,
곧이어 둘째 세진, 막내 세미까지
막내 세미는 마흔 넘어 낳은, 말 그대로 '보너스'였다.
정희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시절의 정희는
하루에도 몇 번씩 퇴근 후 아이를 안고 울었다.
이유식을 만들며 울었고,
밤중 수유 중에도 울었다.
직장은 놓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바로 복직했다.
그 사이 남편은 지방으로 발령이 났고,
정희는 홀로 아이 셋을 키우며 주말부부로 살아야 했다.
첫째 아이 돌 무렵,
어느 날 밤.
정희는 태수의 핸드폰을 무심코 봤다.
“오빠~ 지금 뭐 해? 언제 와?”
그 짧은 문장 하나에,
그녀는 숨이 멎을 뻔했다.
무릎이 꺾였고, 입술이 바짝 마르고,
심장은 구토처럼 역류했다.
“이게... 뭐야?”
정희가 물었고,
태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이 그냥 후배야. 학교 후배.”
그날 밤, 정희는 아무 말 없이 거실에 앉아 TV만 틀었다.
볼륨도 없이 흐르는 예능 프로그램이
그녀의 웃음기마저 가져가 버렸다.
결국, 그 일은 묻혔다.
증거도, 확신도,
무엇보다 이혼할 용기도 없던 그녀는
그저 덮었다.
또 덮고, 눌렀고, 외면했다.
그렇게 그해 겨울은 조용히 지나갔다.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보다
바람을 몰랐던 척 살아가야 했던 그 현실이
더 차갑게 그녀를 휘감았다.
20년이 흘러, 정희는 더 단단해졌다고 믿고 있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직장과 가정을 돌보며,
남편 태수와는 그럭저럭 ‘무던한 부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거실 소파 위에 남겨진 태수의 휴대폰.
알림 한 줄이 화면에 떠 있었다.
“오늘도 오빠 생각만 났어. 사랑해.”
순간, 정희는 숨을 멈췄다.
뇌는 말렸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메시지를 눌렀다.
그리고, 읽었다.
“나 미쳤나봐, 널 너무 사랑해.”
“네가 있어서 하루가 설레.”
“이런 사랑, 처음이야.”
“우리 어떡하지, 이다음에 뉴질랜드로 같이 떠나서 살자.”
“와이프한텐 들키면 안 돼, 약속. 허술해서 걸릴까 봐 걱정이야”
정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손끝은 차가워졌고, 다리가 풀렸다.
눈앞이 흐려지며,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이 끊길 듯, 울음이 터졌다.
입술을 틀어막고 오열했다.
소리 내 울면 아이들이 깰까 봐,
숨죽여 떨며 울었다.
이게…
내가 지켜온 가정의 실체였나.
손이 떨렸고,
배신감에 숨이 막혔다.
“너랑 난… 끝이야.”
하지만, 그 끝은
바로 아이들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시작이 되었다.
세미는 아직 초등학교 4학년,
세진은 이제 중학생,
세아는 입시에 예민한 고등학생.
정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 좋자고 이 집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정희의 고통은 한동안 그녀를 무너뜨릴 만큼 깊고 오래 지속되었다.
성당에 갔다.
고해성사실 안에서,
눈물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느님… 전, 남편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을, 아직 사랑하거든요.”
신부는 조용히 말했다.
“용서란, 그 사람보다
당신 자신을 위한 일이에요.”
그날 이후,
태수는 거의 무릎을 꿇고 살았다.
정희가 마시는 커피에 설탕을 타줬고,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장을 봐왔고,
말없이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며 눈치를 봤다.
정희는 그 모습을 보며
분노가 아니라
헛헛함을 느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왜 나는 이토록 외롭지?’
요즘 정희는 ‘환승연애’를 챙겨 본다.
설렌다.
사람들 연애하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난다.
“엄마 또 그거 봐? 질리지도 않아?”
세아가 묻는다.
“응. 살아있는 느낌이라서.”
정희는 지금
정서적으로 남편으로부터 독립 중이다.
결혼 20년,
그리고 두 번의 배신.
이젠 그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삶의 중심을 두려 한다.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자신을 벗고
혼자도 괜찮은 여자가 되려 한다.
‘사랑은 함께 있어도 외로운 시간이 찾아올 수 있어.
그 시간 속에서 나를 다시 안아주는 게,
진짜 사랑의 시작일지도 몰라.’
나는 그를 다시 사랑하기 위해
먼저 나를 용서하려 한다.
그가 아닌,
나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