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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Mar 12. 2023

05. 꿈은 지우개 달린 연필,
현실은 지팡이

[에세이] 그때 꿈을, 다시 꾸었다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되는 일. 기억할 필요가 없어진 것의 가장 큰 사례는 아마도 네비게이션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나 네비게이션 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다음에 가려면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공간 인지 기능이 떨어진 것일까? 마치 바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계단까지 비상구로 인식하면서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이용을 당연시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나는 걷기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마저 빼앗긴 기분이다.” – 윤영호 교수

 


  46 Bingham Rd에서 필립과 벨러리 부부와 살았던 과거의 추억은 이제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을 꿈으로 꾸게 되면서 나는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나는 꿈에서 46 Bingham Rd를 찾아 갔고 그곳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고 변하면서 나는 그곳에서 불편함과 주저함을 함께 마주해야 했다. 나는 꿈에서 한참을 그 집 앞에서 기다렸고 나중에서야 마중을 받아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나를 맞았음에도 나를 모르는 것 같았고 나를 처음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들은 과거가 사라진 노년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침묵으로 현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예전의 우리 관계가 생각나 울컥할 뻔했다. 


  나는 그제서야 추억에 휩싸였던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의 그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그들 곁에는 그들을 지키던 개도 고양이도 없었다. 심지어 항상 한쌍으로 생각하던 필립과 벨러리 부부도 이제 아내인 벨러리 혼자였다. 예전과 다르게 변해버린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와야 했다. 나는 꿈에서 그들에게 기도를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그냥 지금처럼 나를 기억하지 않게 해달라고 소망했다. 혹시라도 이것으로 그들이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나는 꿈에서 간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했다.


  세상이 캔버스에 그려진 그림처럼 느껴졌다. 여기에는 어떠한 깊이도 어떠한 기적도 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세상은 어쩌면 무표정에 무관심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이것은 착잡한 일이고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다. 인생 역시도 되돌리거나 늦출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 또한 무뚝뚝하게 견뎌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자꾸 뒤돌아보고 그리워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횟수가 줄고 다른 현실의 것들에 바빠지면서 서서히 잊혀지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차창 밖으로 지나친 풍경의 일부처럼 기억 마저도 점점 더 멀리로 잊혀져 버릴 것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나, 그리고 필립과 벨러리 부부가 살았던 46 Bingham Rd 역시도 서로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고 잊혀져 버릴 것이다. 그렇지만 46 Bingham Rd가 정다웠던 집으로, 정겨웠던 사람들로, 봄날 같던 눈부신 기억들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넘치며 일렁이면 좋겠다. 더 오래 가슴을 울리고 눈물도 흘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움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꽃들이 뭉클뭉클 피어나듯 그리움도 이곳 저곳에서 향기를 풍기면 좋겠다. 일렁이는 그리움을 따라가며 감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움이 자리한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궁금한 것들을 풀어 보고 싶다. 어떻게 지냈는지를 묻는 것으로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소나기 마냥 얘기들을 방울방울 터뜨려 보고 싶다. 그런데도 이젠 그들과의 모든 그리움을 가슴에 담기로 했다. 세월과 함께 하얗게 바뀌어 버린 현실 앞에서 과거로 역주행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꾼 꿈이 현실이 된다면 나 또한 꿈에서와 같이 그들을 대하고 싶은 생각이고 바램이다. 그리움에 뒤로 하고 현실을 그리고 그들을 대하고 싶다.


 관계가 꼭 특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관계란 포크와 나이프라기 보다 연필과 지우개와 같이 하나로 만난 지우개 달린 연필 같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여러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멀티펜이라기 보다 지팡이 같이 조용히 의지하게 해주는 존재가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관계라는 것이 능력을 더하기 보다 자신을 지우개질 해주고 불편한 상대의 다리에 길동무가 되어 주는 유순한 사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치고 신통치 않은 마음을 달래고 싶어 간단히 짐을 챙겨 가까운 곳으로 주말 여행을 가보려 한다. 그러면서 맛난 것도 재미난 것도 찾아가며 기분도 달래 보려 한다. 현재라는 일상에 좀 더 집중하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에 조금이라도 초연해지고 싶은 바램이다. 그런데도 찾아오는 오래된 기억들이 있다면 좀 더 가볍게 대해 보고 싶다. 과거가 추억을 넘어 걱정으로 바뀌거나 더 멀리 달리지 않게 하면서 말이다. 


> 이미지 출처 : https:// www.dw.com/en /constance-becomes-first-german-city-to-declare-climate-emergency/a-4858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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