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kb 하우스 Mar 04. 2023

04. 46 Bingham Rd

[에세이] 그때 꿈을, 다시 꾸었다


“공짜는 없다. 아이는 게임의 실력이 늘어 갈수록 더욱 복잡한 게임을 찾는다.

게임에 이기기 위해 바친 수고가 현실의 고통을 넘어설 때도 있다.

이는 게임에서 거둔 승리가 현실에서 거둔 승리와 같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역사를 조명하는 드라마도 아이를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역사를 앞에 내세울 때는 그 역사의 승리를 되새기고,

 그 좌절에서 승리의 약속을 발견하자는 것이다.” – 황현산 교수

 


  우리가 느끼는 그리움에는 그때의 특별한 공간에 대한 기억도 함께 하게 된다. 그리움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하며 그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선명했던 처음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서 엉키고 어수선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그리웠던 기억을 꿈으로 꾸는 날은 기분은 물론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생각했던 기억과 꿈에 나타난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길목에 바리케이드가 새로 쳐지는 기분이며, 내가 기억하는 특별한 장소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 기분이 든다. 이렇듯 내가 기억하고 있던 과거의 것들이 홀연히 사라지거나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데는 따로 지름길 같은 게 없을 거란 생각을 해 본다. 구불구불하고 오래된 길이어야 여유롭고 추억도 이곳저곳에 깊이깊이 남기고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걷는 길이어야 분명 추억으로 다시 기억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 행방을 확인하며 걷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일 것이다. 운 좋게 그 때와 똑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기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를 것 같다. ‘그래, 여기야’ ‘그래, 기억나’하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구간에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길은 누가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누가 나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냥 좋을 것 같다. 그저 주변을 지나가는 차 소리며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내는 소리가 어울려 이 공간을 채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46 Bingham Rd에서 잠시 산 적이 있다. 빨간 벽돌의 2층 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골목은 한적했고 탁 트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냥 이렇게 그곳을 기억했고 아주 가끔씩 그곳을 회상했다. 그런데, 꿈을 다시 꾸면서 나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언젠가 찾아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가 현실에서 불가능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만남이라는 기쁨의 뒷면에 무거운 것들이 자리하고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반갑게 꼬리를 흔드는 모습이 강아지가 아닌 뱀의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알아 버린 것이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행운으로 꿈에 그곳에 갔고 그곳에서 나는 꿈에 그리던 주인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주말 늦은 아침이었고 꿈은 예전보다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어색함 때문인지 나는 곧장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마당 한 가운데서 우두커니 서서 숨을 고르고 또 골라야 했다. 그간의 무심했던 나의 행동과 시간이 걱정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리워하면서도 찾지 못한 데는 혹시 모를 쓸쓸함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달라진 모습과 함께 존재에 대해 겁이 났던 것이다. 나는 46 Bingham Rd에서 필립과 벨러리와 함께 살았다. 화가인 필립과 자수를 하는 벨러리는 개와 함께 생활했다. 주말이면 우리는 푸르도와 피핀을 데리고 산책을 했고 이곳저곳을 함께 다녔다. 가끔은 차를 운전해 먼 거리의 친척 모임을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시간을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의 소식을 모르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젠 과거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든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결정으로 뭉쳐진 추억들이 한순간 파편으로 바뀌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느낀 것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반짝이며 밝히는 조명이 빛을 잃듯 영롱하던 그때 그들과의 추억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 조차도 날씨는 차갑다. 한겨울의 모습처럼 따갑기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과거에 대한 기억도 시간과 함께 식어간다. 손끝으로 짜릿짜릿하게 다가왔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느껴 보고 싶지만 이를 대하는 나의 손끝은 차갑게 얼어붙어 듯하다. 과거의 추억들은 하얀 눈으로 결빙되어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빙하기 속으로 깊숙이 숨어 드는 듯하다. 희미했던 기억을 시작으로 지금 가장 선명한 기억들까지도 마치 나무가 쌓인 눈을 떨구듯 나의 마음도 나의 추억도 자꾸만 풀썩거린다. 그러면서 기억은 꿈속에 다시 파묻힌다.


> 이미지 출처: https:// www.loopnet .com/Listing/40-Bingham-Rd-Nottingham/18355736/

작가의 이전글 03. 새벽이면, 기억은 낙엽 소리를 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