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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Mar 18. 2023

06. 필립 & 벨러리

[에세이] 그때 꿈을, 다시 꾸었다

“일상의 반복과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 낯선 곳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래서 멀리 갈수록 기대와 기쁨은 비례한다. 

인류가 살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이동하던 것이 여행의 기원일 것이다. 

여기에는 낯선 풍경과 마주해야 하고 새로운 음식과도 문화와도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닌 돌아오는 것이라 한다. 

여행은 출발지로 돌아오기 때문에 방랑이나 도피와는 다르다. 

그래서 여행은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설레임과 초조함의 경계에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우리는 한단계 더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은 화려한 런웨이가 아니라 지치고 지저분한 나를 거쳐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내면을 보석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그래서 모든 여행이 즐거운 것은 아니지만 실패한 여행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  장석주 시인



  내가 필립과 벨러리를 처음 만난 건 정확히 26년 전이다. 내가 본 필립과 벨러리는 애니메이션에 존재하는 월레스와 그로밋과 꼭 닮아 있었다. 그들은 나이부터 생김새며 행동까지도 꼭 같았다. 필립은 마른 체형에 동그란 안경을 썼으며 청바지에 라운드 티셔츠를 즐거 입었다. 밸러리는 필립이 사랑에 빠진 웬돌린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수일을 했고 가위로 직접 자른 헤어스타일에 스웨터를 즐거 입었다. 이것이 내가 본 그들의 첫인상이다.


  반면 그 시절 나는 겁이 많았다. 혼자서 어디로 떠나 본적도 혼자서 지내 본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낯선 이방인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교성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기에 처음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서로가 어색했고 이야기의 주제 역시도 많지 않았다. 아침에 인사를 나누고 저녁때면 같이 TV를 보며 차를 같이 마시는 정도의 관계였다. 이렇게 나는 여느 평범한 주인집에 잠시 임차를 하여 지내는 정도의 관계였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몇 주의 시간이 지나고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게 되었다. 둘 사이에는 피핀과 푸르도라는 두 마리의 개가 있었는데 그들을 따라 산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개 데리고 산책갈건데.” “같이 갈래?”라고 주말 오전 벨러리가 예의상 묻는 질문에 내가 그만 승낙을 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또 나는 이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그녀가 혼자서 산책을 나가야 하니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내가 맡아 달라는 것으로 나는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목줄을 채워 현관문을 나와 집주변의 공원을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 여정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벨러리의 생각은 나와 많이 달랐다. 내가 분담해서 산책을 시키는 것도 그렇다고 집주변을 걷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개들이 제일 좋아할 만한 산책을 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의식과 준비를 했다. 그리고는 개들을 차 뒷좌석에 태워 1시간을 넘게 달려 자연이라는 명칭이 어울리는 숲속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우리는 이곳을 시작으로 끝이 없을 것 같은 넓은 숲길을 걷고 또 걸었다. 개들은 목줄 없이 자유롭게 다녔고 그동안의 정해진 그들의 루틴에 맞춰 앞서 걷기도 했고 뒤를 천천히 따라 걷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정해진 경로를 벗어나 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기다리며 한참 동안 지켜봐야 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되니 개들을 산책을 시켰다기 보다 내가 그들 덕에 쉬고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주말이고 날씨가 허락할 때면 같이 산책을 갈 수 있게 되면서 나는 그들의 일상에 동행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한번은 산책 중에 그녀가 남편 필립의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필립은 늦은 나이에 마라톤을 시작해 보스턴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놀랍고 부럽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녀는 필립이 마라톤을 하는데 걱정이 많았다. 이것은 많은 나이에 대한 부담에 더해 필립이 심장 수술을 하고 페이스 메이커를 달고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혼자 달리기를 할 때면 걱정이 많다고 했다. 나는 마라톤을 달려 본적도 없고 달리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내가 필립 옆에서 같이 달려 주겠다고 대답했다. 이렇게 필립과 나는 같이 달리기는 시작했다. 주말이면 이런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많아지면서 평범할 것 같았던 일상이 점점 특별한 사이가 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냥 옆을 지키며 달리는 파트너로만 머물지 않았다. 필립이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서는 나를 위해 지역에서 개최되는 마라톤에 등록해주고 같이 달려주었다.


  주말 저녁 식사에는 자연스럽게 와인이 곁들여졌다. 그러면서 필립과 벨러리 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스스로 격식을 따지지 않는 성격이라 생각 했는데 그들은 나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커다란 반전을 그들은 감추고 있었다. 그들은 여느 평범한 영국의 노부부가 아니었다. 그들의 얘기를 바로 앞에 마주 앉아 듣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들의 과거를 상상해 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필립은 젊은 시절 히피였다. 파티에 갈 때면 그는 욕조 물속에 들어가 몸에 꼭 끼는 청바지를 입느라 수십분을 보냈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의 집에서 여동생인 벨러리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둘의 사랑 역시 특별했다. 필립과 벨러리의 결혼식 역시 히피 스타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필립은 빨간색 정장에 샌들을 신고 입장했고, 벨러리는 검정색 드레스에 검정 립스틱을 바르고 신부님 앞에서 서약을 했다고 했다. 나는 그들의 자유분방했던 삶과 얘기들을 그대로 믿었다.


> 이미지 출처: https:// www. alzheimersresearchuk.org/events/bournemouth-half-marathon-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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