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들풀언덕 _ 부모와 살던 집을 기억으로 남기며
부모님 팔순을 기념하여 가기로 한 울릉도 가족여행의 예약을 마치면서 이제 우리는 포항 선착장까지 가는 교통편만 결정하면 되었습니다. 내가 KTX를 타고 가서 합류하기로 하면서 오랜만에 대중교통으로 고향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대중교통을 잘 이용하지 않지만 작년 제주도 여행을 하면서 렌터카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을 다녔는데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KTX를 예약하고 어머니는 시내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다듬으며 곧 있을 여행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바램과는 다르게 가족 여행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미용실에 있을 때 외삼촌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은 것입니다. 이 소식에 어머니는 차분히 머리 손질을 마치고 집에 들러 채비를 해서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외삼촌을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편치가 않았습니다. 외삼촌은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지내고 있었고 항상 힘든 일을 찾아서 했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주 전, 어머니는 외삼촌과 만날 마지막 기회를 놓치면서 이를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외삼촌이 직접 농사 지은 몇 가지 채소를 가지고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그때 마침 어머니가 잠깐 집을 비운 것입니다. 외삼촌은 기다리거나 전화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가져온 것들을 문 앞에 놓고 그냥 갔다고 합니다. 간발의 차이로 집에 돌아온 어머니가 외삼촌에게 전화를 했지만 1~2km 거리임에도 차를 돌리지 않고 다음에 보자며 그냥 갔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외삼촌이 오면 주려고 밑반찬까지 만들어 놓았는데 그때 건네지 못한 걸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장례 기간동안 어머니는 그냥 묵묵히 장례식장을 가서는 늦은 시간까지 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동생은 어머니의 공허함을 채우며 옆을 지켰습니다.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저 어머니의 상처가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습니다. 외삼촌은 시골에서 일 밖에 모르는 듬직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생각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술에 의지하는 날이 많아 지면서 결과 또한 안 좋게 된 것입니다.
어린시절 방학때면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에 세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면 환승 정류장에서 점심나절까지 기다렸다 다시 차를 타고 꼬불꼬불 비포장길을 한시간 남짓 달려야 갈 수 있는 버스 종점에 있는 산속 마을이었습니다. 이후로는 서로가 바빠 보지 못하다가 내가 외삼촌과 가까워 진 것은 대학 겨울방학 기간에 돈을 벌기 위해 외삼촌이 하는 벌목장 일을 하게 되면서입니다. 조림을 새로 하기 위해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내면 그것들을 차에 실어 산 아래로 가져다 나르는 일로 외삼촌은 농사일이 없는 겨울철이면 산판이라 부르는 이 일을 했습니다.
산판 일을 하기 위해 외삼촌은 특수 차량을 제작했고 인부 몇 명을 데리고 이 일을 했습니다. 하루 일당이 비싸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만큼 일은 힘들었고 눈이라도 한번 오면 산에 차량이 오르지 못해 며칠씩 일을 못하게 되면서 막상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몇일 쉬고 나면 다시 일터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나 역시도 여러가지 막노동을 해 보았지만 산에서 나무를 싣고 나르는 산판 일보다 힘든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외삼촌과 보낼 수 있었던 2개월의 시간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일의 편의를 위해 산판 아래 있는 마을에 방을 얻어 숙식을 했는데, 고된 산판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따뜻하게 데워진 방에서 몸을 녹이며 둘러 앉아 저녁상에 막걸리로 그날의 피로를 풀 수 있었습니다.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 이렇게 힘든 일을 어떻게 하냐는 나의 질문에 외삼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그냥 웃기만 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힘들다는 말을 외삼촌에게서 들어 본적이 없는 것 같아 더 먹먹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