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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kb 하우스 Aug 19. 2022

02. 인생에서 하이킥 세례를 맞으면

[에세이] 나는 퇴사에 실패했다

  퇴사 첫날은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습니다. 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무엇을 하지?”였습니다. 마치 출근이라는 명령어가 순간 없어지게 되면서 나의 신체가 보낸 오작동의 신호 같았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욕구들이 순서도 규칙도 없이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한가지 질문이 파랑을 만들면서 오만가지 생각으로 커지며 해일로 변해 버렸습니다. 나는 테이블 한쪽에 놓인 종이와 펜을 가져다 내 앞에 펼치는 것으로 뒤덮였던 새하얀 공포와 복잡해지는 머리속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무의식에 쓰게 되는 글쓰기가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작년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고쳐 쓰기를 반복하고 생각을 다듬으면서 답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20년을 넘게 디자이너로 한 직장에서 일해 왔습니다. 업무로 보면 못된 인맥은 아니지만 회사라는 인맥 교집합을 빼고 나면 내성적인 성격이 더해져 초라한 성적표가 되어 버립니다. 마치 라면에서 따뜻한 국물이 비워지고 면만 남은 모습 같이 퍽퍽해 보입니다.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에서 일사불란하게 생활을 해오다 덜컥 홀로서기를 선언하였지만 아직 어떠한 계획도 마련하지 못한 채 첫째날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볼품없이 식어버린 면과 같이 뻣뻣한 몸을 만지며 이것저것 눕고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인사팀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 퇴사 절차를 문의해 놓고 나니 순간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걸려오는 전화도 받지 않다가 더는 방해받지 않고 싶다는 생각에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시간을 공백으로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놓아 두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았고 마치 영화관처럼 완전히 어두워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는 나이 50이라는 숫자를 각막에 띄웠습니다. 그리고는 텅 빈 어두운 공간 한쪽에 앉아 2라운드 종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2라운드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벌써 지치고 힘까지 빠진 모습으로 무엇보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2라운드가 시작되면 세상의 하이킥에 맞서며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쓰러지면 눈을 감고 시간이 그냥 흐르게 두는 게 아니라 10, 9, 8하고 줄어드는 카운트 다운을 멈추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일 없다는 듯 다시 두 팔을 이마와 가슴에 차곡히 붙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의 꿈은 화려한 펀치를 성공시키며 두 팔을 들고 환호하는 모습이기 보다 나는 차라리 이 화려한 펀치를 맞고 2라운드를 KO로 끝내지 않겠다고 끝까지 버티며 몸부림치고 싶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넓은 세상에서 나와 꼭같은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한 명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말이지요. 우리나라는 작아서 없다면 일본 아니면 유럽 어딘가에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약속처럼 서로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자신과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가 미래의 내 자신과 만나고 싶다면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인 것입니다. 부족한 오늘의 내 자신과 생각을 매만지고 다듬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만의 길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퇴사를 기회로 새 길을 찾다 보면, 내가 꿈꾸었던 산길로 들어서게 되고, 또 이 길을 차근차근 성실히 나아가다 보면 정상에서 진짜인 나를 찾고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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