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막차 바로 전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휴대폰 속 시계는 11시 35분을 향하고 있었다.
덜커덩, 덜커덩 거리는 한적한 전철 안에서 나는 혼자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하며
간절한 염불을 외웠다.
'제발.. 지하철에서 새해를 맞이하지 않게 해 주세요'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탄 덕에 나는 11시 56분 집 도착이라는 기적적인 순간을 만들어냈고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연말 시상식 속 카운트 다운을 따라 1월 1일 00시 00분이 되는 순간 환호를 질렀다.
그리고, 끝이었다.
나의 연말과 연초는 친구들과 술을 먹다 급하게 들어온 집 안에서 카운트 다운을 외치고 종결이다.
가족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남긴 채 방으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는데 깜박하고 놓고 온 지갑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 찜찜했다.
참 별거 없구나..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막상 아무것도 없는 현실을 마주치니 허탈감이 밀려왔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이 공존하는 이 특별한 순간이 이렇게나 시시껄렁하게 흘러가다니, 괜히 아니꼬웠다.
도심 곳곳의 나무들에게는 형형색색의 전구 액세서리가 둘러지는 계절, 어쩌면 우리 집 뒷문으로 산타가 선물을 놓고 가진 않을까 허무맹랑한 동화마저 믿고 싶어 지는 겨울.
소복소복 쌓이는 눈, 캐시미어 머플러, 차가운 공기, 조금은 들떠 보이는 길 위의 분위기.
이상하게도 연말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난 혼자서도 괜찮아' 하고 큰 소리 뻥뻥 치던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감출 수 없는 감성이 재채기처럼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나 역시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하려 했지만 아, 이번에는 나이의 앞자리도 바뀐다고요...?
울어도 괜찮다면 조금만 울어야겠다.
연말에 유독 외로운 이유는 특유의 분위기도 있지만 급작스레 세월을 실감하는 데에서 오는 것도 크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별 자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지만 이제 한 해가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자연스레 지금까지의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지 않는가.
그러다 보면 아, 내가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이렇게 내 1년이 끝나도 되는 걸까...? 그전에 한 번쯤은 이렇다 할 성과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미련이 생겨난다.
그리고 기적을 바라게 된다. 갑작스레 새로운 인연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라던가 예상치 못한 즐거운 일이 생길지도 몰라! 같은.
하지만 아무 일 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마음은 조급해진다. 정말 이대로 끝이라니. 그 허무함과 좌절감이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니 말이다.
연말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적 정의로는 연초의 계획 실패나 외로움 등으로 연말이 다가오면 우울해지는 병증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우울감을 한 번씩 겪는다고 하며 증후군이란 말까지 생겨날 정도니 이 연말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센치하게 만들었을지 실감하기 두려울 정도다.
나의 경우 딱히 연초의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없었으니 실패할 것도 없고, 바라는 건 확률이 814만 분의 1이라는 로또 당첨밖에 없는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어 가고 있지만, 외로움으로 투병 중인 사람에게 연말증후군은 합병증인 셈이므로 지극히 당연하게도 우울해졌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이렇게 우울한 건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다시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만 같다. 지금까지 다들 그렇게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나는 이번 연말과 연초를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내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알아보는 테스트 기간이고 나는 꼭 이 테스트를 통과하겠다고 말이다.
지금 아무 일이 없어도 괜찮다. 나의 모든 하루는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