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또 그렇게 진심이야
누구나 살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더러운 사람은 '좀 씻고 살아라'라는 말을, 예민한 사람은 '왜 이렇게 까탈스럽냐'는 말을, 티비를 보고 낄낄거리는 사람은 '너 그렇게 살아서 뭐 될래'라는 말을 종종 또는 매일같이 듣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런 말을 꽤나 많이 듣게 된다."넌 항상 진심이구나", "뭘 이런 걸 가지고 삐지냐", "미련 좀 버려", "넌 참 추진력이 대단해" 정리하자면 나는 매사 진심인 데다가 잘 삐지고 미련 투성이인 주제에 행동력은 빠른 사람인 듯하다.
부정하고 싶은데 한구석도 거를 곳 없이 나를 표현하고 있으니 긍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릴 때부터 순수한 건지 순진한 건지 아님 생각이 아예 없는 건지 누군가 "우리 이거 해볼래?" 라던가 "이거 재밌을 거 같지 않아?" 하며 가볍게 던진 농담에도 "그래! 그럼 내일부터 해볼까? 나는 시간 되는데" 또는 "재밌겠다 우리 당장 하자" 라며 무거운 진심을 담아 눈을 반짝거리곤 했다.
이런 불도저 같은 성미가 수학 공부 같은 학문 수양에도 적용됐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야자 째기 라던가 지하철 타고 목적지 없이 떠나보기 라던가 술이라던가 남자 친구라던가 연애 같은 것들에만 적용되니 쓸모는 거의 없었다.
반대로 매사 가볍게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순간들도 많았다. "네가 먼저 이거 같이 하자고 했잖아"라는 나의 물음에 "아니 그걸 진짜로 받아들이면 어떡해"라고 대답이 돌아왔을 때의 그 허탈감이란. 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전해줬는데 상대방은 마음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을 때의 그 간질거림이란. 나만 또 진심이었지.
어째서 사람들은 나처럼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려고만 하는지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것은 나의 이기적인 부분 중 하나이다
누구든지 진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저 보여줄 필요가 없는 순간에는 보여주지 않았을 뿐이고 나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선택함에 있어서 신중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방패 없이 창만 들고 전장에 나간 미련한 전사였던 것 같다. 언제든 마음이 다치려는 순간 "아니 그렇게 진심은 아니었어"라고 방패를 내밀었어야 하는데 "나는 방패를 들만큼 나약하지 않아!" 하고 외치며 쏟아지는 화살을 전부 맞고 서있었으니 피를 주룩주룩 흘리며 쓰러질 수밖에.
진심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두고 보호해야 했는데 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매달아 놓으며 "이보시오 나의 진심을 알아주시오 내 진심이 이렇게 크답니다!" 확성기에 대고 소리쳤으니 나의 약점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는 꼴이었다.
내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것도 진심을 보호할 나만의 방패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주 단단하고 의지할 수 있는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가 있다면 불바다 속에서도 의연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찌질이인 나는 안다. 남들보다 유독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은 마음이 콩알만 해서가 아니다. 그저 매사 남들보다 진심일 뿐이고 그 진심을 가릴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다.
진심이 큰 쪽이 나쁜 건 아니지만 주로 상처 받는 쪽이긴 하다. 계속 얻어맞다 보면 마음에도 맷집이 생긴 다지만 굳이 막을 수 있는 상처들까지 고스란히 받을 필요는 없다. 솔직함이 꼭 미덕은 아니고 가끔은 가볍게 넘어가는 것도 중요하니까.
요즘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몇 가지 자동 리액션을 장착해 놓으니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다.
"아~ 그렇구나", "아 그러네", "저는 괜찮아요", "재밌겠다 나중에 시간 되면 같이 하자", "코로나 끝나면 만나서 밥 한번 먹어요", "진짜? 대박이다", "전 원래 집에서 누워있는 거 좋아해요", "술은 잘 못 먹어요", "아 술 먹는 분위기는 좋아해요", "외롭긴 한데 드라마 과몰입했더니 시간이 빨리 가더라", "하하하"
주의사항은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영혼을 실어 리듬감 있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은 반짝일수록 좋다. 이걸 따라 하라는 건 아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진심이야